2024-04-20 23:25 (토)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㉕역사가 된 영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㉕역사가 된 영화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9.27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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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없는 '공생(共生)' 분위기 속 '히틀러 풍자' 영화 제작 소식 유탄
' 눈치 없는 ' 채플린 때리던 서방 주요국, 히틀러의 폴란드 공격에 채플린 편들기 나서

언론에 <위대한 독재자>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세상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많은 이들이 영화제작을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보스 히틀러가 희화화되는 것을 막아야 했고 미국과 영국정부는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채플린은 굽히지 않았다. 끝까지 밀어붙였다. <위대한 독재자>는 그렇게 빛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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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일정을 보자. 1937년 어느 날 아이디를 얻고 약 1년 뒤인 1938년 10월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다. 1939년 9월 3일에는 스크립트 등사판이 완료돼 배포되고 1939년 9월 9일 촬영이 시작된다. 촬영은 6개월 뒤인 1940년 3월 28일 끝나고 다음 날부터 편집이 시작된다. 시사회가 개최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6개월이 지난 1940년 9월 5일. 그 후 한 달 뒤인 10월 15일 마침내 영화가 대중에게 선을 보인다.

이처럼 아이디어에서 개봉까지 약 3년 가까운 시간이 간다. 이 기간은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채플린이 남긴 불후의 명작 <위대한 독재자>가 만들어진 시기인 탓이다. 하지만 세계사적 시각에서도 이 기간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를 장악하겠다는 히틀러가 흑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일반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와 역사가, 영화사와 일반역사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영화제작 중단하라!"

영화에 대한 첫 기사는 1938년 10월 17일 나온다. '전쟁불가'를 외치던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넘긴다"는 '뮌헨협정'을 체결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독일을 경계하고 견제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총 한 방 쏴보지도 않고 쉽게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준 이유? 히틀러를 달랜 것이다. 그를 어르고 달래며 조심조심 전쟁 없는 '공생(共生)'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데에서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채플린이라는 희대(希代)의 코미디언이 맘먹고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 아닌가. 정치나 외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계에서 히틀러를 자극하는 꼴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영토를 넘기며 히틀러를 간신히 어르던 연합국들이었다. 적이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속이 뒤틀린 히틀러가 또 뭔가 빌미를 잡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곤혹스러운 요구를 할지도 몰랐다.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당시 크렘린에서 악수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과 악수하는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당시 크렘린에서 악수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과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

채플린과 세계 주요 나라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꿰차고 있던 독일과 그 형제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상영불가'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상영불가'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히틀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영화계에서도 좋지 않은 반응이 나았다. 개봉이 어렵지 않겠느냐며 제작중단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위대한 독재자>는 채플린이 만든 첫 번째 유성영화다. 1939년 1월 초 스튜디오 내 녹음을 위한 방음공사를 시작했고 1월 17일에는 12쪽 짜리 '완결판 시놉시스(Complete Synopsis)'가 나왔다. 며칠 뒤인 21일에는 형 시드니가 헐리웃에 도착, 채플린의 작업에 동참했다. 이후 수 십 차례의 시나리오 회의와 기획을 거쳐 시나리오 완성본이 나온 것이다.

스크립트 등사판이 배포된 게 1939년 9월 3일이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됐으며 곧 촬영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 날짜에 주목해야 한다. 1939년 9월 3일이다. 20일 전인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됐고 이틀 전인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연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스크립터가 나온 바로 그날 당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전장(戰場)에 뛰어들었다.

유럽의 전황(戰況)은 이렇게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영화를 둘러싼 전황도 바뀌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국경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서방의 주요 나라들은 모두 그의 눈치 보기에 바빴다. 모두가 채플린을 때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파시스트들은 물론 주요 나라의 정부와 언론 모두가 하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분위기는 180° 바뀐다. 파시스트를 제외한 주요 나라 정부와 언론은 채플린 편이 됐다. 훗날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서둘러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가 촬영을 마치고 편집에 들어가고 시사회를 갖고 마침내 개봉이 될 때까지는 이후 약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다. 이 기간 또한 매우 중요하다.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자. 1940년 3월 28일에 촬영이 끝나고 다음날인 3월 29일 편집을 시작한다. 이후 반년이 지난 9월 5일 시사회가 열렸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 15일 영화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개봉된다.

이 1년 동안 전쟁은 영화 이상으로 속도가 붙었다. 촬영을 끝내고 편집이 한창일 1940년 4월 무렵이었다. 이때 독일은 덴마크를 장악했고 5월 들어서는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 벨기에를 점령했고 6월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까지 손에 넣는다. 시사회가 열릴 무렵인 9월 이탈리아가 영국 통치령 이집트를 공격, 영국의 허를 찔렀고 개봉을 20일 앞둔 1940년 9월 27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조약'을 체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렸다.

'위대한 독재자'개봉 당일 인산인해를 이룬 뉴욕 애스터 극장.
'위대한 독재자' 개봉 당일 인산인해를 이룬 뉴욕 애스터 극장.

히틀러라는 인물 하나 때문에 벌어진 세계전쟁이었다. 세계는 그로 인해 '불바다'가 됐다. 세계 곳곳에서 그에 대한 증오와 혐오,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런데 그런 그를 비웃고 웃음거리로 만든 채플린의 영화가 개봉된다, 그것도 '유성(有聲)'으로···. 세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점령한 나라에서야 어차피 '상영금지' 됐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은 많았다. 영국과 북ㆍ남미 지역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영화는 '대박'이 났다. 뉴욕 개봉관은 애스터와 캐피털 극장 두 곳이었다. 개봉 첫날, 두 곳 모두의 표는 순식간에 매진됐고 극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영국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개봉된 날은 뉴욕보다 두 달이 지난 1940년 12월 16일로 런던에 대한 독일 공습이 절정에 달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런던 시민은 극장을 찾았다. 그들은 히틀러에 대한 조롱을 즐거워했다. 영화의 흥행과 관련해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면서 내 돈 200만 달러와 2년여의 시간을 투자했다. ··· 캐피털 극장에서 <위대한 독재자>를 개봉하는 날 엄청난 인파가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화를 보고 흥분하고 열광했다. 그렇게 뉴욕의 두 극장에서 영화는 15주 동안 상영됐고 그때까지 내 영화중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온갖 협박과 압력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 제작에만 힘썼던 채플린의 노고(勞苦)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해피엔딩'이라는 평가는 단순한 '흥행'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위대한 독재자>에 대한 평가는 남다르다. 채플린 영화 중 최대 흥행작일 뿐 아니라 그가 만든 최초의 유성영화요, 그때까지 썼던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일부에서는,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영화 개봉 이후 히틀러의 대외 활동이 줄었다고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라면 전쟁 자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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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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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골프 2022-10-09 23:26:50
'영화 위대한 독재자' 기사 잘 읽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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