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09:40 (일)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㉔영국 뒤통수 친 히틀러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㉔영국 뒤통수 친 히틀러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9.1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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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체코 땅 넘보자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이 나서 1938년 9월 '전쟁 방지용' 땅 떼주기 중재해
평화 얻었다고 했지만 1년 뒤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 맺은 후 폴란드 침공해 2차세계대전 불 당겨

<위대한 독재자>는 격변의 역사와 얽히며 역사의 파도를 탄 보기드믄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동자 히틀러의 흑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채플린은 그에 대한 풍자영화를 기획했고, 전쟁이 터질 무렵 스크립터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개봉될 무렵 독일은 영국과 치열한 공중전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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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회에 '가상기사' 하나를 써 봤다. 봉준호 감독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의 대만 침공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가 일으킬 평지풍파에 대해 정리했다. 우선 중국의 최고 수장에 대한 희화화로 외교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한 정부나 언론의 '외압(外押)'이 있을 수 있다고 봤다. 또 만일 봉 감독이 고집을 부려 영화 제작과 개봉을 강행한다면 문제는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물론 봉 감독이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만들자는 영화가 줄을 섰을 텐데 공연히 정치ㆍ외교적 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다른 영화감독들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돈을 댈 제작사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잘못하면 개봉도 못하거나 개봉한다 해도 흥행에 실패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제작비를 댈 제작사는 없을 것이다.

채플린이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 때 상황이 이와 비슷했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알렉산더 코르다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그게 1937년 일이었다. 영화 개봉일은 1940년 10월 15일. 아이디어를 얻은 지 3년 남짓 뒤의 일이었다. 이 '제작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이 역사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었고 영화는, 특이하게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일정을 보자.

➀ 1937년 : 아이디어 구상 ➁ 1938년 10월 : 시나리오 작업 착수 ➂ 1939년 6월 : 판권 등록 ➃ 1939년 9월 3일 : 스크립트 등사판 완료 ➄ 1939년 9월 9일 : 본 촬영 개시 ➅ 1940년 3월 28일 : 촬영 종료 ➆ 1940년 3월 29일 : 편집 개시 ➇ 1940년 6월 : 연설 신 재촬영 ➈ 1940년 7월 3일 : 편집 재개 ➉ 1940년 9월 5일 : 시사회 개최 ⑪ 1940년 10월 15일 : 개봉

채플린 역시 영화의 주제가 민감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38년 초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무렵 이미 직원 및 관계자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시나리오 작업이 막 시작된 1938년 10월 17일 유력 일간지 『신시내티 인콰이어러(The Cincinnati Enquirer)』가 "채플린이 히틀러 풍자 영화를 제작 중"이라는 내용으로 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이후 기사는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 '전쟁기피증' 영국 vs. '전쟁광(狂)' 히틀러

기사 내용은 소상했다. 그리고 거의 정확했다. 채플린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거나 곧 촬영이 시작될 것이라거나 1인 2역을 할 것이라는 등이었다. 채플린의 영화가 완성되지 않았고 개봉되지도 않았지만 그가 그릴 히틀러의 모습은 대충 그려졌다. 채플린은 희극인이었고 풍자의 대가였다. 어떤 식으로든 히틀러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룰 것이 틀림없었다. 이는 곧장 유럽과 미국의 정계 및 외교가를 자극했다.

히틀러의 절대 권력은 1933년 1월 수상 취임에서 시작됐다. 두 달이 지난 3월 23일, 그는 의회를 협박해 '비상조치법(Enabling Act)'을 통과시키게 만든다. 이로써 히틀러 내각은 의회 동의 없이 4년 동안 법률 제정 권한 부여받는다. 그리고 9월 1일 '제3제국'을 선포하며 준(準) '황제'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대통령직까지 꿰찬다. 수상과 대통령의 권한 모두를 장악한 것이다.

합병 선언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독일군.
합병 선언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독일군.

히틀러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세계 패권을 거머쥐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수상이 된 후 독일을 '제3제국'이라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수상 취임 이후 히틀러는 목표 달성을 위한 광폭행보에 나섰다. 1933년 10월 일방적으로 국제연맹과 세계군축회의에서 탈퇴했고 군사력을 베르사유조약에서 한정한 10만의 6배에 이르는 60만까지 늘렸다. 1936년 3월에는 비무장으로 유지되던 라인란트지역을 점령, 베르사유 조약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히틀러의 성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군사적 뿐 아니라 외교 측면에서도 상당한 결실을 봤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에게 군사력을 지원, 독일의 힘을 과시했고 3개월 뒤에는 이탈리아 무솔리니를 만나 동맹을 체결,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의 시작을 알렸다. 다음해인 1938년 2월에는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인 '추축국' 또는 '3국 동맹'의 골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독일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뮌헨회의의 대표들.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독일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뮌헨회의의 대표들.

이후 히틀러는 이웃 나라에 대한 흑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첫 번째 상대는 오스트리아였다. 독일은 늘 역사와 문화가 같은 오스트리아를 늘 독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를 근거로 은밀히 오스트리아와의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 반대파가 반기를 들었다. 1938년 3월 히틀러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단행하려 했던 것이다. 격노한 히틀러는 바로 군사력 투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꼬리를 내렸다. 국민투표를 중단하고 히틀러에게 나라를 내주고 만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삼킨 히틀러는 곧바로 체코슬로바키아로 눈을 돌렸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지역 주데텐란트였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독일계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를 빌미로 히틀러는 이 지역 역시 '제3제국'의 일부라 주장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주장은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았다. 군사력 동원을 준비했던 것이다. 체코슬로비키아는 오스트리아와 달랐다. 결사항쟁을 다짐했고 주변 나라들도 체코를 돕고자 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나섰던 이가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었다. 당연한 얘기였겠지만, 그로서는 히틀러의 행태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자칫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을 끝낸 지 2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에게 전쟁은 어떤 방법으로든 막아야 할 절체절명의 '사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평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쟁만 없다면 히틀러에게 일부 양보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1938년 9월 뮌헨 회담이 개최된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영국의 총리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그리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만나 독일-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이 회담 결과 히틀러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떼어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속수무책이었고 체임벌린을 "평화를 얻었다"며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9년 8월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다음 달인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전쟁기피증'에 걸린 영국을 희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체임벌린은 '20세기 가장 무능한 서구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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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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