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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 역사기행② '70년 국제시장'의 부활가
◇전통시장 역사기행② '70년 국제시장'의 부활가
  • 부산=(취재ㆍ사진)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06.2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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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번영회 창립 올해로 50주년… 물자부족 겪던 50,60년대엔 전국 시장 상인들로 북적
수입자유화 몸살 겪은 후 상권회복 다각 시도…'청년 몰' 만들어 젊은 창업자와 공생 모색
영화 국제시장에 소개됐던 '꽃분이네' 가게는 지금도 운영중이다. 이상우 상가번영회 회장은
영화 국제시장에 소개됐던 '꽃분이네' 가게는 지금도 운영중이다. 이상우 상가번영회 회장은 "국제시장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와 함께 했고 지금은 소비자중심의 시장으로 변신을 다각도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시장의 주연배우 황정민이 연기장면을 간판 옆에 붙여놨다.사진=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2014년 겨울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의 자화상을 그렸다. 영화의 주무대인 국제시장은 영화 줄거리 그대로 해방후 80년때까지 30여년 가까이 우리나라 상품 유통의 허브역할을 했다. 영화에 나오는 ‘꽃분이네’가게는 지금도 실제로 운영되고 있다. 부산 중구 신창동 4번지에 위치한 국제시장에는 1500칸에 이르는 가게에서 700여명의 상인들이 시장을 지키고 있다.

관객 1400여만명을 동원해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와는 달리 국제시장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요즘 부활의 시동을 걸고 있다.

  지난달에 취임한 이상우 국제시장번영회 회장은 “국제시장은 전국 생활 용품의 공급기지 였다”며 “가게를 열면 돈을 자루로 벌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다할 금전계산기가 없던 시절이라 물건을 판 돈을 자루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 밤새 온 식구들이 돈을 세다가 졸았다는고 한다.

국제시장의 간판옆에는 사람 인(人)자를 형상화 한 심벌에서도 알수 있듯이 상인들은 소비자들이 적정한 가격에 좋은 풀짐을 살수 있도록 상거래 질서를 투명하게 운영하려고 노력중이다.
국제시장의 간판옆에는 사람 인(人)자를 형상화 한 심벌에서도 알수 있듯이 상인들은 소비자들이 적정한 가격에 좋은 풀짐을 살수 있도록 상거래 질서를 투명하게 운영하려고 노력중이다.

미군 구호물자와 밀수품이 한꺼번에 부산항으로 쏟아지자 국제시장에는 전국의 상인들로 북적였다. 심지어 서울의 남대문시장 상인들도 이곳에서 물건을 떼지 못하면 장사할 물건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 회장은 “여기서 돈을 벌어 대기업을 일군 사업가들이 여럿 나왔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일합섬과 쌍용시멘트는 이 국제시장에서 기반을 잡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상우 상가번영회 회장도 70년대에 국제시장에 둥지를 튼 이후 40년 넘게 의류판매장을 운영주우이다. 그는
이상우 상가번영회 회장도 70년대에 국제시장에 둥지를 튼 이후 40년 넘게 의류판매장을 운영중이다. 그는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가도 손님이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밝은 얼굴로 손님을 대하는 것은 상인의 기본자세"라고 말한다. 사진=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그런 까닭에 당시 국제시장에 점포를 마련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 어려웠다. 권리금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게를 내놓는 사람들이 없었다. 구조적으로 연분이 없으면 가게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전쟁후 베이붐이 일면서 공급물자가 달리자 가게를 열기만 하면 장사가 잘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국제시장에는 품질이 좋은 외제 밀수품이 넘쳐나 돈을 미리 주고 사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상가 곳곳에 경찰관을 세워놓고 밀수품을 단속했다. 밀수품 유통과 연결된 검은 주먹들이 상인들을 겁박하는 일도 적잖았다.

전국의 돈이 다 몰렸다는 이 국제시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장의 위세가 떨어쟜다. 국산 공산품이 하나 둘씩 전국에 유통되고 1990년대 수입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국제시장에 가야 살수 있었던 물품들이 전국 각지에서 손쉽게 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의 청년몰에서 음식가게를 연 젊은이는
국제시장의 청년몰에서 음식가게를 연 젊은이는 "공대를 나왔지만 요리하는게 좋아 일반식당에서 일을 배운후 가게를 열었다"며 "돈이 모아지면 번듯한 음식점을 운영할 것"이라며 꿈을 키우고 있다. 사진=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1945년 해방과 6.25전쟁 전후로 내려온 이북 피난민들이 부산 대청동과 보수동의 산비탈에 판자집을 지어 살며 생계수단의 하나로 지금의 국제시장 주변에 옹기종기 보따리 좌판을 연 것이 국제시장의 뿌리이다. 그러자 정부는 1948년 이 곳을 자유시장이라고 명명하고 12개동 단층 목조 상가건물을 건립했다. 이어 1950년 지금의 ‘국제시장’으로 개명돼 제법 현대화된 상가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1952년과 1969년의 큰불로 거의 전소되다 시피했다. 이후 몇차례 더 불이 난 이후 정부지원으로 몇 단계에 걸쳐 상가 리모텔링을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 평 반도 안되는 면적의 상가 한 칸의 매매가는 800만원~2000만원 수준이다. 1969년 결성된 상인연합회(국제시장 번영회의 전신)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상가번영회 사무실에는 1951년 6.25전쟁중 상인들의 활동내용이 담은 사진 걸려 있는 등 국제시장 70년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국제시장번영회의 곽대섭 과장은 “국제시장은 여전히 부산의 얼굴 중 하나”라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상인 모두가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시장은 한국 근대사의 발자취와 함께했다. 경제발전은 물론 민주화의 물꼬를 여는 광장역할도 했다. 1979년 부마사태와 1987년 민주화 항쟁 때는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이 국제시장 주변에서 쫓기자 상인들이 이들을 숨겨 주고 음료와 먹거리를 제공했다. 불이 난 상가의 주인을 돕는데 팔을 걷었다. 자신의 장사는 접어두고 타다 남은 물건을 길거리에 내놔 물건을 대신을 팔아주는 등 화재피해 상인의 재기를 도왔다.  지금도 국제시장 상인들의 결속력은 다른 시장 못지 않다고 한다.

국제시장은 신흥 상권의 도전을 꾸준히 받고 있다. 시장의 반경 1km이내에 전통시장 19곳과 대형백화점, 마트 등이 들어섰다. 이상우 번영회 회장은 “국내 대표적인 전통 재래시장의 명성을 되찾고 하는 상인들의 의지가 강하다”며 “정가 판매와 불량제품 무제한 교환 등 소비자보호운동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어 고객들의 호응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활력이 떨어졌던 이유는 상인들의 전통적인 상거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일부 상인들이 마수거래(첫거래)때는 물건교환을 안해주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90년대 수입자유화 조치는 국제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곳이 아니라도 외제품을 살 곳이 많아진 것이다. 해방후 근대사의 숨결을 간직한 국제시장은 영화제작의 공간으로 주목을 받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활로를 여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사진=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90년대 수입자유화 조치는 국제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곳이 아니라도 외제품을 살 곳이 많아진 것이다. 해방후 근대사의 숨결을 간직한 국제시장은 영화제작의 공간으로 주목을 받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활로를 여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상사건물위에 영화제작의 중심지라는 설명이 보인다.사진=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이 회장은 “우리 국제시장에서 파는 물건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은 전국 최고수준”이라며 “같은 제품을 홈쇼핑에서 살 때보다 국제시장에서 구입하는 게 더 쌀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장과 직거래로 물건을 공급하고 마진도 홈쇼핑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최근 국제시장은 청년 상인들과 동반성장을 꿈꾸고 있다. 청년들의 창업 꿈을 이루게 하고 일자리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이른바 ‘청년몰’이 몇년전부터 국제시장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상우 회장은 “상가건물의 일부를 저렴한 임대로로 청년들에게 빌려줘 사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며 “이제 국제시장은 젊은 상인과 젊은 소비자들이 공유하는 공간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년몰 푸드코트에서 돈까스 가게을 운영중인 한 젊은이는 “공대를 나왔지만 요리하는 게 좋아 음식가게를 열었다다”며 “대학졸업 후 음식점에서 일을 거들면서 창업준비를 했고 돈이 모아지면 번듯한 음식점을 낼 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그는 아직 손님이 없는 오전 시간에 계란을 정리하는 등 요리 준비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루 매출액이 얼마냐”고 묻자 “좋아하는 일이니까 힘든 줄 모른다. 매출액은 비밀”이라고 말했다.

국제시장은 지금도 없는게 없을 정도의 ’만물상‘역할을 하고 있다. 여전히 부산지역 도소매의 중심 시장의 하나이다. 철물과 공구 조명등의 산업용품을 비롯해 ▲침구와 도기,주단 한복 등의 혼수용품▲의류와 내의▲악세사리▲문구 등 생활용품 등을 다양하게 판다. 평일에는 하루 5만명, 주말에는 10만여명이 찾는다고 한다. 국제시장은 누가 뭐래도 우리경제 유통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리고 민생 경기진단의 현장 가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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