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11:06 (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별세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별세
  •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9.06.11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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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오후 11시37분 별세했다. 향년 97세.

이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노환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수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최근 앓고 있던 간암 등이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희호 여사는 서울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희호 여사 장례위원회는 11일 오전 발표문을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장례위원회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고인의 유언을 공개했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켰으며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미국 램버스대를 거쳐 스카렛대를 졸업했다. 1958년 귀국 후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초대 대한YWCA 총무 등을 맡아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강한 당시 '혼인신고를 합시다',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라는 구호를 만들어 파격적인 여성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아 남녀 차별적 법 조항을 고치기 위한 활동에 힘썼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출범한 '여성단체협의회' 조직화에도 앞장섰다.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마흔의 나이에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 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데다 차 씨마저 1959년 세상을 떠나 낙심이 큰 상태였다. 주변에선 '정치 낭인'인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이 여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여사는 후일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라고 밝혔다. 1963년 3남 홍걸씨를 낳았다.

이 여사는 결혼 이후 김 전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95만표 차이로 낙선하며 야권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역설적으로 부부에게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1972년), 납치사건(1973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군사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이 여사는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시간이 한 달에 20분에 불과하자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후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각각 출판됐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연금 기간 도청을 우려해 중요한 대화를 필담으로 주고받은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여사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에 구명운동을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해금이 이뤄지자 13대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1992년 14대 대선 역시 실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97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 당선의 꿈을 이뤘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라고 적었다.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 여사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퍼스트레이디로서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외환위기 직후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봉사단체인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을 만들었다. 이 여사는 청와대를 떠나면서 대부분 직함을 정리하면서도 이 두 단체는 마지막까지 고문직을 맡을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첫 여성부가 출범하는 데에도 이 여사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를 비롯해 여성계 인사들의 정계 진출의 문호를 넓힌 당사자기도 하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미경 한국국제협력재단 이사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등이 김 전 대통령 발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 전 대통령을 동행해 영부인으로는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 재직 시절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까지 잇달아 구속되는 등 시련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이때를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때이자 악몽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사는 "내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재야와 동교동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해왔다. 마지막까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지키며 대북 사업을 뒷받침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2015년 7월에도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목적으로 방북했는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 여사는 미국 교회여성연합의 '용감한 여성상', 미국 캘리포니아주 '이 해의 탁월한 여성상', 무궁화대훈장, 펄벅 인터내셔널 '올해의 여성상' 등 인권과 여성문제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서전 '동행'에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회고했다.

발인은 14일,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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