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전장터로 나가 지리산과 동부 전선등서 맹활약…참전 체험기 펴내 '전쟁의 참혹함'알려
둘째로 태어나 부엌 일 돕다가 요리에 눈 떠 환갑 무렵 창업 "근검 절약이 인생 고비 넘기는 전략"
“나는그런 소리가 가장 싫어.” 6.25참전 노병 강영채(87)사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 손님 중에 간혹 “아저씨 때문에 통일이 안됐잖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한다. 그는 기자에게 “아무리 농담이라고 하지만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지켜냈는데...”라며 “전장에서 산화한 전우들은 그럼 뭐가 되느냐”고 말했다. 6.25전쟁은 휴전중이지만 여전히 남북은 무력 대치중이다.
그럼에도 그 때 ‘(공산)통일’을 할 기회를 국군이 막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손님이 있다고 강씨는 말한다. 아무리 이념으로 갈라서고 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58세때인 1990년 제주시 신산로길 인근에 ‘돌하르방’이라는 제주토속 음식점을 열었다. 휴전이 되자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1955년 정부는 무공훈장을 줬다. 그 훈장증에 쓰여진 문구를 별도로 표구해 식당 내부 한켠에 걸어놨다. 18세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운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굶기를 밥먹듯 했지. 건방 한 봉지로 이틀을 버텼어. 보급은 형편없었지만 이 한 몸 나라 수호의 제단에 바친다는 각오로 싸웠지. 야산에서 전투를 하다가도 홀연히 나비가 헬멧에 내려 앉으면 산화한 전우가 환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 혈전이라는 말은 부족해. 전쟁터는 아비규환이야. 그런 전쟁 다시 일어 나선 안돼.” 제주가 고향인 강 사장은 제주도 주정공장 공터에서 열흘 가량 겨우 총쏘는 훈련을 받고 지리산과 동부,중부 전선에 투입됐고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군봇을 벗은 후 고향에서 공무원, 작은 배의 선장으로 활동했다. 정년이 다가오자 “적당한 일거리는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해 음식점을 열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야. 나라가 없어지면 자유가 없어져. 우리가 일군 번영은 말 할 것도 없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많은 노병들은 전쟁 트라우마로 평생 고생한다고 한다. 어느 미국 참전 용사는 “29개월동안 한국에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는가. 다시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얼마나 당시가 고통스러우면 그럴까.
그래서 강 사장은 전쟁의 의미와 참혹함을 후세에 전하기위해 25년전에 ‘피어린 혈전 실기’라는 참전 기록을 펴냈다. “전쟁에서 목숨을 다한 젊은이들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을 갖도록 글을 썼지. 군인은 말야. 오로지 나라에 충성하는 거야. 여기에 군인의 명예와 영광이 있는 법이지.”
인생도 전투라는 그에게 굳이 식당경영에 나서게 된 연유를 물었다. “내가 3형제중 둘째야. 첫째와 막내는 집안일을 거들지 않는데 둘째라서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왔지. 등 넘어로 요리를 배웠고 한번은 내가 끓인 해산물 요리를 지인들이 먹어보고 다 맛있다고 하더군”
돌하르방의 대표 메뉴는 ‘각재기(전갱이)’국이다. 매일 아침, 시내 어시장에서 싱싱한 것을 사와 만든다고 한다. 여름에는 ‘자리물회’ 가을에는 늙은 호박에 끓여주는 ‘갈치국’을 맛보려고 오는 단골이 적잖다. 이 식당은 점심 한끼만을 만든다. 그래서 오전 11시에 문을 열고 오후 2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나이들어 창업을 했기에 무리하면 건강을 해친다는 생각을 했지. 뭔가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어. 전투에서도 우선 아군의 실력을 살피고 작전을 펴야 해.”
강 사장은 30년째 이 식당일을 하고 있다. 오후 3시가 다 되면 은행문이 닫힐까봐, 서둘러 그날 수입을 정리해 돈 가방에 넣는다. 매일 은행에 돈을 맡긴다. “인생은 말야. 조냥(절약)하면서 살아야해. 누구나 비오는 날이 있어. 우산이 있어야 해. 하하.” 웃으면서 거수경례를 하는 ‘어르신 사장님’의 인생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