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사회 인프라 구축에 도움 줘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씨앗이 된 점은 분명
국가발전 위한 자발적 '희생양' 인식은 무리 … 일자리 없을 때여서 대졸자도 몰려
역사는 절대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이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료의 취사선택과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역사의 '변주'가 가능하다. 사료가 얼마나 많든, 그리 오래지 않든 예외는 없다.
이를테면 1960년대 파독(派獨) 광부·간호사를 둘러싼 '신화'가 그렇다.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며 이를 미화하고 상찬하는 것은 보고 싶은 한 면만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1963년 파독 광부 1진 243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후 1963년부터 77년까지 광부와 간호사를 합쳐 모두 1만 2천여 명이 파견되었다. 물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인력 수출은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정권이 서독 정부에 아쉬운 소리를 한 데 따른 것이긴 했다. 쿠데타의 정당화를 위해 경제발전에 목말랐던 한국 정부는 수출산업 육성을 위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지만 외국자본을 들여올 길이 막막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엔 차관을 줄 수 없다 했고, 일본과는 한일회담으로 국교를 맺기 전이어서 청구권 배상자금은 꿈도 못 꿀 때였다. 이에 군사정권은 서독에 경제사절단을 파견해 교섭한 끝에 4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했다. 문제는 기업은 물론 국가 신용이 낮아 지급보증을 해줄 방안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서독에 인력 수출을 하되 이들의 3년간 급여를 서독 은행인 코메르츠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해 담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타결되었다.
요즘 우리나라 국력을 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광부과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갔고,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빌린 돈이 공장·도로 등 사회 인프라에 투자되었다. 그러니 이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더라도 당시 서독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국가발전을 위한 '희생양'으로만 보고 영웅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과 달리 이번에는 지원 열기가 뜨거웠던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1차로 광부 5천 명 모집에 4만 명, 간호사 2천 명 모집에 2만 명이 몰렸으니 경쟁률이 8~10대 1에 이를 정도였으니 '희생'을 위해 자발적으로 몰려든 이들이 그리 많았을 리 없다.
당시 한국에선 안정적 일자리가 적었던 데다 서독의 광부 임금은 한국의 7~8배 정도의 고임금이었던 반면, 당시엔 유럽 선진국에 가볼 드문 기회였다는 사실 등이 겹쳐 '파독'은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정부가 2년 이상의 광부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했음에도 갱도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대졸자들이 관련서류를 위조해 대거 응모했을까. 오히려 '진짜 광부'들은 필요 서류를 구비하는 데 서툴러 루르 지방에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을까.
이는 『한국현대사산책』(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중 '1960년대편 2권'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를 보면 오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훗날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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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