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2:50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00)朴통의 소리없는 통곡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00)朴통의 소리없는 통곡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2.10.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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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 내가 아버지 '라고 자랑하던 2차 경제개발 계획 평가 회의 열리던 날 타계
김정렴 비서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던 박통에게 ' 김 전 부총리 별세 '라는 메모 건네
왕초 "개발연대 순교자" 평가…박통 "내가 김부총리를 너무 과로시킨 탓" 자책해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3월 21일 오전 10시 중앙청 대회의실. 쓰루가 '내가 아버지'라고 자랑하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마무리하고 평가하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던 박통에게 '김 전 부총리 별세'라는 메모를 전했다. 쪽지를 보고도 무표정이던 박통이 화장실에 가는 듯 잠시 자리를 떴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치고는 너무 긴 시간이 흘러,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이 회의실 뒤편으로 박통을 찾아 나섰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그가 찾은 박통은 소리 없는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날 혜화동 자택에 차려진 빈소를 왕초가 누구보다 일찍 찾았다. 그는 병풍을 젖히고 차가운 쓰루의 시신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자리를 뜨며 그는 "개발연대의 순교자"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박통은 김 비서실장과 조상호 의전비서관을 보내 문상케 하고 유족에게 조의를 표했다. 행정부에서는 태완선 부총리를 위시하여 각 부처 장관과 차관들이, 국회에서는 백두진 국회의장, 정해영 부의장과 정일권 의원, 재경위를 중심으로 하는 여야 의원 등 하루 만에 약 400명이 문상에 임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문상이 눈길을 끌었다.

1972년 3월 22일 경향신문 추모기사.
정일권 전 총리가 1972년 3월 22일자『경향신문』 1면에 조사(弔詞)를 기고했다.

그날 정일권 전 총리가 『경향신문』 1면에 조사(弔詞)를 기고했다.

"…… 고인은 이제 겨우 입명의 경지에서 국가사회를 위해 보다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너무도 빨리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미 남긴 업적만으로도 그의 인생을 풍부하고 보람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그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 사람이 고인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그의 애국심과 유머러스한 그의 인품이다.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병마와 최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국가의 앞날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를 찾는 문병객들에게 오히려 재기 넘치는 유머로써 웃음을 안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이는 보기 드문 그의 훌륭한 인품의 발로였다고 하겠다. ……"

다음 날 22일에는 고인의 부산상고 선배로서 재무부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김종대 상공회의소 부회장의 애도의 글이 『동아일보』 2면에 실렸다.

"…… 형은 남들이 험구가라 했지요. 이 험구에 대한 충고자로서 동창들의 권고로 내가 몇 번 충고도 드린 일이 있지만 한편 유머와 위트가 담뿍 담긴 형의 말은 참말로 형의 말대로 축구 등신이나 병신 같은 바보는 미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이며 또한 정녕 바보 같은 말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 형이었습니다. …… 형, 세상에선 '긴축' 하면 형을 연상하리만큼, 늘 인플레가 극심하면 그 뒷수습에 나서야 했고 돈을 아껴 써야 하는 긴축정책 때문에 형은 늘 시달려야 했습니다. 2차 5개년 계획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우리나라 공업화의 기반을 다져놓은 공은 세계은행이나 워싱턴에서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지 않습니까. 형이 성취하신 높은 업적과 공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그날 저녁 박통이 문상을 왔다. 쓰루가 안치된 방에 들러 분향을 마친 박통은 응접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앞에 쓰루의 부인 김 여사가 마주 앉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박통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제 2차 5개년 계획 평가 회의를 하는 도중에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머리가 텅 비어, 보고 내용이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김 부총리를 너무 과로시킨 탓입니다……"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김 여사를 쓰루 생각에 사무치게 했다. 복받치는 울음을 억누르느라 목이 멘 그녀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해설을 빌려 3면에 더없이 정중한 장문의 헌사를 바쳤다.

"발랄한 재기와 무궁한 해학으로 숱한 기행과 화제를 남기고 한 재상이 타계했다. …… 그는 지난 50년 고시 1회에 합격하여 외자구매처의 한 직업 공무원에서 출발한 이래 20여 년, 별세할 때까지 완전 공인이었다. 그는 사생활이 없었다. 외고집스럽다 싶은 그의 멸사봉공 정신이 재상의 명을 재촉했다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아쉬워한다. 그의 일대와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경제정책에 하나의 에포크를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그는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재직, 그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고 3차 5개년 계획은 그 자신이 직접 계획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한 시대의 경제사 주역으로 살다 간 것이다. 직관과 통찰력이 예리했던 그는 전임 장관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종합제철을 밀고 나가 포항 벌판에 해머 소리가 울리게 했고 가족계획사업 도입에 발 벗고 나서 인구증가율을 둔화시켜 국제적으로 우리나라가족계획사업을 각광받게 했다. 그는 계수 외기에는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어 외국인들 사이에는 인간컴퓨터란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 그는 부하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공적인 일에는 무지무지하게 엄격했으며 틀렸다고 생각하면 책망이 대단했다. 기실 그는 이름난 험구가였다. 그러나 그의 험구를 들은 사람일수록 승진이 빨랐다고 그가 간 지금 옛 부하들은 술회하고 있다.…… 그는 경제 이론에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러나 원론과 현실을 구별할 줄 아는 현실 감각이 있었다. 물가정책 같은 것도 원론적 해결보다 현실행정을 즐겨 구사했다. …… 그의 강렬했던 인간상은 틈틈이 돌출하는 순진성의 단면으로 해서 인간적인 밀착을 상대방에게 주곤 했다. …… 그는 기관장 중에서 밀도 높은 체취를 남긴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재무부 장관 때는 '옛 재무부의 영광을 다시 찾자'고 선창하고 나섰고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기획원 장관 시절에는 『이런 간부는 사표를 써라』라는 책을 수백 권 사서 권장, 관가의 신풍을 불러일으켰다. 깡마른 체구의 동류형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외국인 가운데는 링컨 미 대통령을 제일 존경했다. ……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한 것과 같이 아마도 자기는 빈곤과 무지에서 대중을 해방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실 그는 평소의 포부를 물을라치면 손가락 두 개를 눈앞에 내밀고 '빈곤과 무지를 없애는 것' 하고 소리쳤었다. 병마와 싸우기 6개월, 그는 '한 가지 포부를 더 추가했습니다. 질병도 몰아내야겠습니다' 하더니 끝내 그 병마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죽고 나면 개만도 못하게 취급당한다는 정승, 쓰루의 가는 길은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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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왼쪽)와 그의 아버지인 김학렬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왼쪽)와 그의 아버지인 김학렬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경기중,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2020년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 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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