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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⑩ '무일푼'히틀러의 반전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⑩ '무일푼'히틀러의 반전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4.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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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주당(DDP)를 새운 정치인이자 '금융 천재' 샤흐트, 히틀러에 접근
주요 기업인을 히틀러에 소개 … 총선 직후 돈에 쪼들렸던 히틀러에 단비

유럽 열강은 히틀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 봤다. 히틀러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전과 하이퍼인플레이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공황이 독일을 덮쳤다. 누가 봐도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히틀러에게는, 비록, '돈'은 없었지만 '그 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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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릴리 햘마르 샤흐트(Horace Greeley Hjalmar Schacht). 1877년 생. 덴마크 피를 가진 독일인. 덴마크식 이름에 부친이 좋아하는 미국 언론인 호러스 그릴리의 이름을 얹어 이름이 길어졌다. 보통은 짧게 햘마르 샤흐트로 불린다. '천재'거나 '수재'임이 분명했다. 1899년 겨우 스물 둘의 나이에 경제학 박사가 됐다. 1903년 그는 독일 민간은행인 드레스덴 은행에 입사, 금융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 그는, 당연하게도, 탁월한 금융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1915년부터 7년 동안 그는 독일국립은행의 이사직을 맡는다.

히틀러와 함께 한 햘마르 샤흐트.
히틀러와 함께 한 햘마르 샤흐트.

하지만 그는 단순한 금융인이 아니었다.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당대 최고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등과 함께 독일민주당(DDP)를 설립, 이후 금융계와 정계를 동시에 아우르는 '큰손'으로 활동한다. 금융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그의 1차 목표는 독일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수장이었다. 독일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을 쥘 수 있는 자리였다.

■ 대권 꿈 꾼 중앙은행 총재

기회가 왔다. 1923년 11월 20일이었다. 그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끝낼 렌텐마르크 화폐개혁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라이히스방크의 총재였던 인물은 루돌프 하펜슈타인(Rudolf Havenstein). 사실은 그가 개혁의 총책임자였다. 하지만 정계와 금융계 모두에서 신임을 잃고 있었다. 이로써 일개 통화위원이었던 샤흐트가 전권을 쥘 수 있었다. 화폐개혁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추방은 자연스럽게 그의 공이 됐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4년 그는 마침내 꿈꾸던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중앙은행 총재로서 그는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배상금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이 문제가 가닥을 잡은 것은 1929년이었다. 그해 미국 은행가 오웬 D. 영(Owen D. Young)을 의장으로 한 새로운 배상금 지불방안이 회의 안건으로 올라왔다. 이른바 '영플랜(Young Plan)'이었다. 이 회의에서 샤흐트는 독일 수석대표였다. 영플랜은 그에게 만족스러웠다. 연합국 측이 배상금 금액을 대폭 줄여줬던 것이다. 1929년 6월 7일 샤흐트는, 당연히 이 플랜에 사인을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일부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배상금 액수가 좀 줄어들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좋아졌냐는 얘기였다. 여론은 갚아야 할 배상금 액수가 여전히 부담스럽다고 주장했다. 특히 나치당을 비롯한 극우보수의 목소리가 셌다. 그들은 영플랜은 잘못됐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수개월 뒤에는 더 큰 문제가 터졌다. 미국 월가에서 주가가 대폭락하며 대공황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독일 경제는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깎아줬다 해도 배상금은 큰 빚이었다.

상황이 바뀌자 그의 태도도 돌변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현실이 자신의 생각과 영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영플랜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돌연 중앙은행 총재직을 벗어던진다. 그때가 1930년 3월 7일이었다. 총재가 된지 6년 만이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갔다. 배상금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비난하며 영플랜 반대시위까지 나섰던 것이다. 단순한 금융인이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행위였을 것이다.

이게 다였을까? 아니다. 그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야심가였다. 중앙은행 총재직을 떠나 그 위의 직책, 최고의 직책, 대권을 꿈꿨던 것이다. 당시 독일은 이원집정부제였다.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총리 임명권에 의회 해산권, 그리고 원내 과반 정당이 없을 경우 의회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비상대권이 주어졌다. 총리는 내각 구성과 국가 운영을 맡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총리, 비상시에는 대통령에게 힘이 실리는 권력구조였다.

1933년 3월 악수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 총리.
1933년 3월 악수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 총리.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에 몸을 맡길 참이었다. 그의 눈에 히틀러와 나치가 들어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나치는 107석을 얻었다. 득표율은 18.3%. 이로써 나치당은 143석을 얻은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이어 제2정당으로 급부상했다. 2년 전 선거에서의 득표율이 2.2%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이는 곧 나라 전체가 보수ㆍ우익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했다.

가급적 대세를 따르려는 게 정치인이다. 선거 직후 샤흐트는 히틀러에 접근한다. 지인을 통해 헤르만 괴링(Hermann W. Göring)을 소개받은 뒤 그를 통해 히틀러를 만나려 했다. 그리고 1931년 1월 마침내 두 거물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됐다. 샤흐트는 이 만남에서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금융전문가인 리아콰트 아메드(Liaquat Ahamed)는 그의 책 『금융의 제왕』에서 샤흐트가 본 히틀러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샤흐트는 그날 히틀러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독일 제2당의 당수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겸손했으며 ··· 2시간 동안 ··· 대화를 주도했다. 대화의 95%는 그가 말했다. ··· 히틀러는 논리 정연했고 선전을 하려는 의도 없이 말했지만 타고난 선동가임이 분명했다. 황홀해 하는 이 은행가에게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샤흐트만 히틀러에게 빠져 들었을까? 아메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히틀러 역시 샤흐트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아메드는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쓰고 있다. "히틀러는 나중에 샤흐트를 가리켜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로 생각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둘은 이렇게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듯 보였다.

하지만 시작은 샤흐트였다. 첫 만남 이후 샤흐트는 히틀러를 돕고자 했다. 금융인이 정치인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돈'이었다. 정치인은 늘 '돈'이 필요하다. 선거를 끝낸 직후라면 더욱 그렇다. 샤흐트는 히틀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독일 내 주요 기업인들을 대거 연결시켜 줬다. 히틀러로서는 천운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든든한 경제적 배경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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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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