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부처 ㆍ정계는 물론 언론까지 그의 권위 인정했지만 먹구름 엄습해
1971년 대선의 해에 물가 급등하자' 언론의 실망 '에 뜻밖 병마까지 겹쳐
1971년은 선거의 해였다. 4월 대선과 5월 총선을 앞두고 김학렬은 전국을 돌며 박 정권의 경제적 성과와 향후 경제 발전 홍보에 열을 올렸다. '정치인 쓰루'에 언론은 실망을 표했다
생활물가마저 손 밖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초조해져갔다. 그해 11월, 그의 사저 2층 서재에 도둑이 든다.
그 사건은 부총리로서 쓰루의 권위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고, 결국 그는 병마로 쓰러지고 만다. 1972년 3월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추
진해온 성과물들은 속속 완성되었다. 4개월 뒤 홍릉에 KDI가 개관했고, 이듬해 7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이 완공되었다. 특히 그가 기획원 조직 안에 남긴 '변혁의 DNA'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 경제에 살아 있다.
쓰루가 부총리 권위에 집착한 것은 와신상담 끝에 쥐게 된 권력에 취하거나 그 갑질을 즐겨서는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과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정책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내고자 하는 조급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동료, 부하 등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자주 상궤를 벗어나는 그의 언행을 마냥 참거나 이해해준 것은 아니었다.
박통이라는 최고 권력의 신임은 쓰루에게 경제정책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안겨주었다. 행정부처와 업계는 물론이고, 정계, 심지어 언론계까지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2년 넘게 박통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다스의 손' 쓰루가 착착 꺼내 보이는 경제(정책)적 성과 덕분이었다. 달리 말하면, 박통의 신임은 부총리로서의 능력을 보이는 동안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행여나 부총리로서 직무 수행 능력에 의심이 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대통령의 문고리 권력은 하루아침에 무산될 수 있는 극히 섬약(纖弱)한 유리잔과 같은 것이었다. 1971년 선거철부터 그런 현상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