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개업해 함박스테이크와 돈가스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첫 경양식 식당 '서울역 그릴'이 30일 폐업했다. 1925년 10월 15일 설립돼 96년 1개월여 동안 한국전쟁과 외환위기 등 숱한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불황을 버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서울역 그릴은 30일자로 영업을 종료한다고 공지했다. 전날 저녁 폐업 소식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로 식당이 붐비기도 했다. 식당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로 고객이 급감해 영업 타격이 심했다"면서 "식당이 있는 서울역사 4층은 리모델링을 거쳐 고급 식당가로 변신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식당은 개업 당시 철도청이 옛 서울역사 2층에서 문을 열었다. 1970년대까지 5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양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개업 당시 40명의 요리사가 있었으며, 한번에 200명의 식사가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정찬 가격은 3원20전으로 당시 15전이었던 설렁탕의 21배에 달하는 호텔급 고급 식당이었다.
당대에 재력을 과시하거나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자주 찾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설가 이상은 작품 '날개'에서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고 서울역 그릴을 묘사했다.
철도청의 방만한 운영과 새로운 경쟁 식당들의 등장으로 영업적자가 쌓였다. 그러다가 1983년 프라자호텔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이후 식당은 여러 차례 사업자가 바뀌고, KTX 서울역사 개장에 따라 장소를 옮기며 오늘에 이르렀다.
100년 가까운 한국 경양식의 역사와 많은 이들의 추억을 간직한 서울역 그릴이 폐업한 자리는 리모델링을 거쳐 최고급 스테이크 전문점이 들어설 것이란 소문이 나 있다. '서울역 그릴' 상호가 다시 식당 이름으로 사용될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