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0:1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86)'왕초'장기영과 박충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86)'왕초'장기영과 박충훈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2.03.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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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 역할해 부총리직 수행에 결정적 도움 … 일에 대한 '헌신과 추진력' 배워
왕초는 업적이 쌓이자 ' (정치적으로) 홀로서기 ' 하려다 임기 후반에 박통 눈 밖에
박충훈은 박통의 필생사업인 종합제철소 건설 추진에 열의나 성과 눈에 띄지 않아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선생'이 있었다. 왕초와 박충훈이었다. 둘 다 반면교사로서 추후 그의 성공적인 부총리직 수행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그들이 어떻게 부총리 겸 기획원 장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또 왜 그 자리를 내놓아야 했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부총리가 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에 대한 헌신과 추진력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왕초는 부총리 입각 전에 보여준 추진력이 입각 후에 더욱 그 힘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반면 박 부총리는 상공부 장관 시절에 (수출 진흥에서) 보여준 추진력이 부총리가 된 후부터는 약해졌다는 평가다.

부총리에서 물러난 이유도 두 사람은 많이 달랐다. 왕초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하나는 부총리로서의 업적이 쌓이면서 '너무 (정치적으로) 홀로서기'를 한 것이다. 임기 후반에 가서는 대통령의 의중이나 (심하게는) 지시에 반하는 의사 결정을 하거나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다. 험담가들은 왕초가 정치적으로 야심이 생긴 징표로 인식하기도 했다. 박통의 눈 밖에 난 왕초의 또 다른 '결격 사유'는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대통령이 애지중지하는 국가사업에 대해 소극적 내지 부정적 입장을 자주 보였다는 점이다. 박통의 의지를 정책으로 실현해야 할 부총리이면서 "그 사업은 우리 능력을 벗어난다", "사업을 추진할 재원이 없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이 그 예였다. 박통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때부터 추진하고파 했던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으로부터도 발을 빼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박충훈 부총리의 경우는 경제정책 총괄(경제팀장) 역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박통의 필생사업인 종합제철소 건설 추진에 별 열의나 성과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그의 퇴임을 설명할 수 있었다.

김학렬은 박충훈(오른쪽)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정치라는 물에 손을 담그기를 피하라'는 맥락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통치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정치, 손에 최소한의 물 묻히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충훈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때 국무총리 서리와 대통령 권한대행을 잇달아 맡았다. 정치적인 욕심이 아니었다. 이미 군부통치가 기정 사실화된 현실에서 사회적 안정을 바랐던 그가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봉사했던 '정치' 였을 것이다. 사진=경향신문.  

두 반면교사가 쓰루에게 남긴 가르침은 첫째, '정치에 욕심을 내지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왕초의 행동으로부터 깨친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라는 물에 손을 담그기를 피하라'는 맥락은 아니었다. 그것은 박부총리의 교훈이었다. 대통령의 통치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정치, 손에 최소한의 물 묻히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선임 부총리의 두 번째 가르침은 대통령의 통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종합제철소, 농촌개발 등 박통이 애지중지하는 사업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깔끔하게 완수하는 것이 기본이자 필수였다. 그것에 온몸을 던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그 나름의 공직관이었다.

이들 사업은 지금의 눈에는 유치한 전시(展示)통치의 산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과 국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잠재적으로 확산해 있던 당시에는 (이들 사업처럼) 무언가 괄목할 만한,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통치의 성과를 내는 것이 정권 안정과 대외 신인도 제고에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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