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선 산업화를 빙자한 개발 독재로 비쳐졌지만 日메이지유신의 국가개혁론에 자극
대통령 특사로 페루 방문당시 '고도성장 비결' 질문 받고 "경제개발계획 강력 추진" 권고
청와대 수석 자리는 정치와 권력의 속성, 특히 무엇이 최고 권력자 박통을 결단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박통의 '중진국 한국'을 위한 염원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쓰루는 박통의 장기 집권을 통한 정치 안정이 한국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 등 총체적 개혁을 통해 중진국으로 나아가는 데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확신 또한 박통이 그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박통이나 쓰루가 성인으로 커갈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총체적 국가 개혁을 통해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부국강병으로 제국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당시 의식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듣고 보고 깨달은 것은, 첫째, 엘리트(출신 지역이나 배경과 무관한 엘리트)가 주도하는 총체적 개혁이어야 한다. '대동아 공영권' 구축을 내걸고 군사화를 추진하던 일본은 중국 침략으로 명실공히 '제국'으로서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차지했다.
둘째, 관민 일체의 (중공업 중심의) 산업화는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
셋째, 관민 일체의 국가 개혁에는 정치적 안정, 즉 집권 체제의 안정이 필수적이다. 그래야 속전속결식의 일사불란한 경제 발전 전략 추진이 가능하다 등이다. 8·15 광복 이후와 4·19 혁명 이후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불안 등을 지켜본 쓰루 세대는, 정경 일체로 일사불란하게 국가의 모든 자원을 부국강병에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의 전제가 되는 정치적 안정은 당시 같은 빈곤과 저개발 상황에서는 곧 정권의 안정을 의미했다. 늦은 밤까지 통음하며 두 사람이 자연스레 이른 결론은 정치 안정 속에 정부 주도로 산업화 추진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이나 언론의 눈으로 보면, 박 정권은 산업화를 빙자한 개발독재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통치철학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는, 그가 대통령 특사로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를 공식 방문하였을 때의 발언 등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페루는 그 전해(1968년)에 박통처럼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 벨라스코알바라도라는 인물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특사 쓰루에게 그가 "한국 경제가 13.1%나 고도성장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쓰루는 "혁명 후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5개년 계획처럼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강권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타인의 눈에는 지나친 용비어천가로 비칠지 모르지만, 박통과 쓰루 두 사람 간의 국가 비전 공유는 제3자가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을 넘고 있었다. 그 후 쓰루가 부총리가 되어 청와대를 떠난 후에도 박통이 쓰루에게 더 이상 '이거해라 저거 해라' 지시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