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혼자 지속 가능한 경제적 번영 이룩 할 수는 없다는 점 새삼 깨달아
학병동기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대면토록 중간 다리역
관료로서 16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쓰루에게 경제수석 기간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배우면서 자신의 비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간 기간이라고 할까. 그것은 또 개안(開眼)의 기간이었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훗날의 도약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재정 운영에서 국가 운영으로: 훗날의 그와 비교할 때, 그가 그때까지 해온 일들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기획, 예산, 외자(원조·차관 등) 등 나라 살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제관료로서 국가 운영을 다루었다고는 하나, 그것도 대통령이 다뤄야 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제한된 범위의 것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국가 전체를 다루는 일, 경제뿐 아니라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치 및 사회의 다양한 사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성장 일변도에서 성장과 균형으로: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그가 생각한 국가 번영의 길은 정부 주도와 성장 일변도의 산업화였다. 그가 지켜본 초기 산업화에 민간의 역할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기업, 가계, 제조업, 금융 등 모든 민간 부문이 정부의 지원과 보호 없이는 한 해를 넘길 수 없는 상태였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그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는 정부가 경제성장을 주도해야겠지만, 아무리 민간 부문이 취약한 개도국이라 할지라도 '정부 혼자서는 지속 가능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성장과 발전이 여전히 지상과제이긴 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는 양적 고도성장이 가져올 수 있는 불안정과 불균형 등 부정적 파급 효과를 전과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다. 수출, 제조업, 대기업 등 성장과 발전을 주도하는 부문 이외에 농업과 농촌,중소기업 등 경쟁력 취약 부문의 사정도 돌아보는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것이다.
경제수석이 되고 난 이후의 그런 새로운 인식은 공업, 도시, 그리고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이어야 한다는 종래의 정책관에서, 농촌 개발이나 중소기업 지원에 대한 강한 입장 또는 3차 5개년 계획의 '성장과 안정과 균형'의 조화라는 새로운 정책 감각을 이끌어내었다.
경제 지상에서 정치 포용으로: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그의 관심은 온통 경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치는 경원시 내지 멸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2년 반을 청와대 수석으로 지내면서 정치 포용이라고 할 만큼 국가 운영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행정부 혼자 모든 걸 이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전에 없이 강해졌다. 정치를 경제 발전으로 나아가는 길의 파트너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수석이 되기 전 국회에 대한 그의 인식은 좋게 말해 '필요없다'는 것이고, 사실상 국회와 그 정치 프로세스에 대해 '낭비'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국회의원에 대한 인식은 더 나빴다. 기껏해야 '무식하다'는 것이고, 아니면 '부정부패만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그가 그들의 요구를 마구 가위질하기 바빴던 게 당연했다. 그런 그의 정치 혐오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더하지만 당시도 성인 대부분은 국회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수석이 되면서부터 국회와 국회의원이 개도국 한국에서 갖는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생겼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삶의 현장'에서 그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국회는 이제 더 이상 고도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국회를 '국정의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회가 요구하는 예산 등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하는 식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바뀌어갔다.
쓰루가 국가 경영과 관련해 갖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인식 변화는 종교계 등 사회집단 또한 국정 운영의 중요한 파트너로 보게 된 점이었다. 그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종교계와 청와대 간 소통 채널로서 작으나마 나름대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담스님과의 교류는 도선사 주지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조계종 종정 때까지 이어졌고(쓰루의 어머니는 장손이 태어나자 청담스님이 주지였던 고성의 한 절에 장손의 이름을 올려놓기도 했다), 학병을 통해 맺게 된 김수환 추기경과의 관계는 해방 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1968년 5월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의식에 쓰루 부부가 초대되었다. 쓰루는 단상에서, 부인은 단하에서 감개무량해하며 김 대주교의 착좌식을 지켜보았다.
1969년 3월 집에서 신문을 보던 쓰루가 "야, 가네마츠 아냐?!" 하고 소리쳤다. 그것은 김 대주교가 대주교가 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추기경이 되었다는 기사였다. 쓰루는 그의 추기경 임명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그는, 김 추기경과 박통을 직접 대면하게 하는 등 집권 세력과 종교계의 두 거두 간의 다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