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0:30 (금)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 ➀100년전 인플레 '망령'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 ➀100년전 인플레 '망령'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9.19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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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무차별 돈 살포에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떠 올라
빵 한덩이 값이 4000억배 오른 충격적 사실…줄서는 도중에도 값 계속 급등
깨진 유리창 갈아끼우는데 집 한채 값… 영화 전반 고물가 시대 진면목 그려

돈이 풀렸다. 풀려도 너무 많이 풀렸다. 팬데믹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지만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은 더 그렇다. 미국 중앙은행의 일을 맡고 있는 연방준비제도(연준, FRS)를 보라. 팬데믹이 터진 뒤 양적완화(QE)라는 이름으로 2020년 한 해 동안 3조 달러가 넘는 돈을 풀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연준은 올 들어서도 국채 800억 달러, 주택저당증권(MBS) 400억 달러를 사들이는 양적완화를 통해 거의 매달 1200억 달러의 돈을 풀고 있다. 이 또한 끝이 아니다. 지난 3월 바이든 대통령은 1조9000억 달러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구제법안'을 내놓은 데 이어 3조5000억 달러의 대규모 지출안도 추진 중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통화량을 대표하는 '광의통화량(M2)'을 보면 알 수 있다. M2는 시중 현금에 은행에서 바로 현금화 할 수 있는 돈의 합계인 M1(협의통화량)에 정기예ㆍ적금 등 약간의 손실을 봐야 현금화할 수 있는 돈을 더한 것이다. 2019년 M2의 평균 잔액은 2810조 원. 2018년 2627조 원보다 약 7.0% 늘어난 수준이다. 하지만 2020년 평균잔액은 3071조 원으로 2019년 대비 9.3% 늘었다. 올 들어서도 M2 증가세는 계속돼 지난 5월 기준 M2 잔액은 3385조 원으로 증가폭은 지난해 평균 대비 약 9.8%에 이른다.

■ 인플레이션? 하이퍼인플레이션?

이런 상태이니 세계 각국에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온다. 뻔하다. 돈을 많이 찍었으니 인플레이션, 즉 통화가치 하락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돈을 특히 많이 푼 미국에서도 나온다. 일단 소비자 물가를 보자. 2021년 6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4% 올랐다. 장기 목표 물가지수가 2%인 나라이니 많은 이들이 놀랐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돈 풀기 때문이라며 그의 이름을 따 '바이든플레이션(Bidenflati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는 게 연준 입장이다. 현재의 물가 상승률은 일시적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2% 전후로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 미국의 ‘돈 풀기’ 정책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에 그의 이름을 붙인 ‘바이든플레이션(Bidenflation)’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바이든 대통령. 미국의 '돈 풀기' 정책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에 그의 이름을 붙인 '바이든플레이션(Bidenflation)'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소비자 물가지수만 보면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미국은 2~6%, 우리나라는 기껏 1~2% 수준으로,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 물가지수에는 한계가 있다. 조사 품목이 많고 이중 상당수는 우리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품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생활물가'라는 것을 따로 작성해 따져본다. 우리나라도 일생생활과 관련이 깊은 품목들에만 한정시켜 물가를 따진다. 우리나라만 보자. 2021년 7월 기준 생활물자지수는 1년 전보다 3.4% 올랐는데, 이는 3년 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그중 특히 식품 관련 물가가 4.4% 올라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식품류의 물가 상승 중 일부는 놀랍다. 계란은 57.0% 올랐고 사과는 60.7%, 배는 52.9%, 마늘은 45.9%, 고춧가루는 34.4%, 국산 기준 돼지고기와 쇠고기, 닭고기는 각각 9.9%, 7.7%, 7.5% 올랐다.

국제 원자재가 상승폭도 가파르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철근 값은 최근 한 달 사이 20%, 고철 값도 올 들어 36% 올랐다. 지난해 8월 t당 6000달러에 거래되던 구리 값도 2021년 8월 현재 9500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해 8월 40달러 수준이었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도 1년 사이 75%나 뛴 70달러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원자재 값 상상은 당연히 생산자 물가에 영향을 준다. 중국의 2021년 7월 생산자물가(PPI)는 9%까지 올랐다. 생산자 물가 상승은 또한 소비자 물가를 자극한다. 수 개 월 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우려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 부문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년 사이 세계적으로 적게는 두 자리, 많게는 세 자리 수까지 뛰어올랐다.

그럼에도 세계경제를 이끄는 미국 연준의 태도는 왠지 좀 느긋해 보인다. 지난 6월 22일 '하원 코로나19 위기 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제롬 파월(Jerome Powell) 연준 의장은 "예상보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하지만 물가를 우려한 선제적인 기준금리 인상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위원회 의원들은 물가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공화당 소속 한 의원은 "물가가 10% 넘게 치솟았던 1970, 1980년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재현될 반복될 가능성이 있느냐"고도 질문했다. 하지만 파월 의장은 부정했다.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고 답했던 것이다.

■ "독일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기억하라!"

하지만 적잖은 전문가들이 이 같은 연준의 느긋한 태도에 비판적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라는 것이다. 거대 자산운영사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Larry Pink) 회장은 "인플레이션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라며 파월 의장의 말에 바로 반기를 들었다.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하버드대 교수도 연준에 비판적이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지낸 그는 지난 7월 18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은 장기화될 수 있다"며 파월 의장의 말을 정면 반박한 뒤 "연준은, 금리 인상은 나중에 한다 해도, 양적 완화는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자 전문사 '사이온자산운용(Scion Asset Managemetn)'의 대표인 투자 전문가 마이클 버리(Michael Burry)는 아마도 세계적 차원의 인플레이션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견해 유명해진 그는 모기지 채권의 선물거래를 통해 거부가 됐으며 그 과정을 다룬 영화 <빅 쇼트(Big Short)>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지난해 4월 팬데믹이 시작되고 연준이 엄청난 규모의 양적완화를 실시하자 바로 인플레이션 얘기를 꺼냈다. 그는 당시 『비즈니스 인사이더(BI)』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일하거나 노는 것을 다시 시작하면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2008년 부동산 위기를 맞춘 마이클 버리. 영화 '빅 쇼트'의 모델로도 유명한 그가 이번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베팅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2008년 부동산 위기를 맞춘 마이클 버리. 영화 '빅 쇼트'의 모델로도 유명한 그가 이번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베팅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올해 초 그의 경고음은 더 세졌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역사상 가장 큰 투기 거품이 끼었다"고 말하며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꺼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상황과 비교했다. "미국정부는 '현대통화이론(MMT)'으로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며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독일은 "부(富)에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으면서 오직 투기에 전념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또한 미국도 독일과 같은 길을 갈 수 있다고 봤는데,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8년의 성숙기와 1년의 붕괴기를 가졌었는데, 미국은 2년의 성숙기와 1년의 붕괴기를 갖는다"고 말했다.

버리가 아니더라도 곳곳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꺼내드는 전문가가 꽤 있다. 인플레이션 중에서도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인플레이션, 그게 하이퍼인플레이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향후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얘기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술적 정의(Technical definition)'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게 보는 이마다 의견이 다르다. 누구는 연간 물가 상승률 10%를, 누구는 50%를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이는 월 50% 이상 상승해야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월 50%? 그건 좀 그렇다. 그렇다면 연간 50%는 가능할까? 일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돈을 많이 찍었으니까.

어쨌거나 최근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출범한 이후 선진국에서 일어난 최악의 인플레이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나 남미의 베네수엘라 등의 최근 사례도 있지만 그 사례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적다. 주먹구구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후진국인 탓이다. 반면 독일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에 모범인 선진국이다. 그런 나라가 물가를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다니. 뭔가 궁금해지고 배울 것이 있어 보인다.

■ 밥 먹는 사이 오르는 밥값

당시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그야말로 파괴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베를린에서 빵 한 덩이 값은 0.5마르크(50페니히)였다. 그게 1922년 말에는 약 160마르크로 320배 올랐고, 1923년 말에는 2000억 마르크로 4000억 배 올랐다. 1922년과 1923년 1년만 비교했을 때 가격차도 무려 12억5000만 배에 이른다. 12억5000만 배···. 전쟁이 끝난 직후 1달러 당 약 8마르크였던 환율은 1921년 전반기에 90마르크로 11배 뛰었다. 이 정도만 해도 숨이 돌아갈 지경인데 인플레가 극에 달했던 1923년에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해 11월 1달러를 사려면 독일 돈 4조2000억 마르크가 있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숫자다.

192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 와중의 돈.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거리를 나뒹군다.
192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 와중의 돈.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거리를 나뒹군다.

하지만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는 나라의 명운과 국민 개개인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1년 사이 물가가 10배나 100배가 아닌 10억 배가 올랐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펴 보자. 여기 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가 남긴 글이다.

"나는 1년 동안 집필한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보냈다. 안전하게 하느라고 나는 출판권에 대한 인세를 선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수표가 도착했을 때 그것은 내가 1주일 전에 보낸 소포에 붙였던 우표 값도 되지 않았다. 전차를 탈 때 그 삯을 100만 마르크권으로 지불했다. ··· 2주 후에는 40만 마르크짜리 지폐를 도랑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거지가 버린 것이었다. 구두끈 값이 옛날의 구두 한 켤레, 아니 2000 켤레의 구두를 갖춘 일류 양화점 가격보다 비쌌다.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려면 옛날의 집 한 채 값을 줘야 했고 책 한 권 값이 예전에 100대의 인쇄기를 갖춘 인쇄소의 값보다 비쌌다."

이 정도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돈값'이 절벽에서 떨어지듯 수직낙하(垂直落下)를 하니 일상에는 잠시의 안정도 찾을 수 없었다.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도중 값이 올라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식사도, 먹기 전과 먹은 후가 값이 달랐다. 그러니 돈이 생기는 즉시 물건을 사야 했다. 아니, 돈을 물건과 바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더 이상 화폐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화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상 국가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덕과 윤리, 가치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살자'는 욕망만 가득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당신은 월급쟁이다. 월 400만원을 받는다. 그런데 4만원 하던 쌀값이 한 달 사이 40만원이 됐다. 5000원 하던 계란 한 판이 5만원이 됐다. 한 달 사이 대부분 물가가 10배 뛰었다. 그렇다면 월급도 한 달 만에 10배 올릴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일은 없다. 두 배만 올라도 다행일 것이다. 연금생활자는 더하다. 연금이 몇 백 프로 오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로써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태에서라면 급여생활자와 연금생활자는 '폭망'이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써서 저축한 것도 꽤 된다고? 그럼 더 망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파괴됐다.

어떤 사회에서든 급여생활자와 연금생활자는 중산층을 대표한다. 급여생활자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약간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부(富)를 축적할 수 있다. 연금생활자는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한 덕에 나이 들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망한다는 것은 중산층이 망한다는 말과 같다. 여기에 자영업자도 포함된다. 외식도 못하고 장에 가 물건을 사기도 힘들다. 팔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영업자도 망할 수밖에 없다. 자영업자에 물건을 대는 중소기업 역시 멀쩡할 수가 없다. 그들도 망한다. 어쩔 수 없이 실업도 늘고 빈곤층도 는다. 사회는 대 혼란에 빠져든다.

이처럼 인플레이션, 그것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결코 경제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의 핵심은 '사회 현상'이며 이는 정치와도 강력하게 연계돼 있다. 『군중과 권력』의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이 사실을 적확하게 꿰뚫어 봤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이 책에서 '군중(Crowd)'이라는 주제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히틀러의 등장을 설명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가장 엄격하고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군중 현상이다. 그것이 한 국가의 국민 모두에게 미치는 혼란은 결코 실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기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문명에서, 전쟁과 혁명을 제외하고는, 그것과 비교할만한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격변은 너무나 심한 탓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거나 아예 감추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또한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고정된 가치인 돈이, 실용적 기능에 전혀 비례하지도 않고 이성에 반하는 동시에 무한히 수치스러운, 군중의 형성에 효과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할 수도 있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은 어려운 책이다. 철학적 개념과 사색이 필요하다. 인용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내용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➀인간은 고독하고 나약하다. 이로 인해 인간은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➁이 '죽음의 공포'는 외부에서 온다. 하지만 인간이 무리를 이루면 이 '무리'와 하나가 됨으로써 '외부'가 사라진다. 이로써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며 인간은 비로소 '살아남기'가 가능해 진다. 인간이 군중을 형성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➂군중 안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소속된 군중 자체가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 '힘'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파괴적이고 살상을 원한다.

④이 군중을 지배하는 자가 진정한 권력자이며 그는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늘 살상의 대상, 즉 희생양을 제공해야 한다.

이 같은 설명을 기반으로 다시 인용 글을 보자. 카네티는 "인플레이션은 군중 현상"이라 했다. 이 말은 이렇게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플레이션은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하며, 이 군중은 파괴적이고 살상을 원하며, 누군가가 이 군중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가 진정한 권력자이며, 그 권력자는 군중에게 인플레이션의 원인 제공자 또는 수혜자를 희생양으로 제공해야 한다, 희생양은 권력자가 상황에 맞게 제공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이토록 무섭다. 그가 말했듯, 그 격변이 지나치게 커서, 전쟁과 혁명을 제외하고는 비교할 만한 게 없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책 『군중과 권력』. 그는 이 책에서 인플레이션을 중요한 ‘군중현상’이라 주장한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책 『군중과 권력』. 그는 이 책에서 인플레이션을 중요한 '군중현상'이라 주장한다.

■ 케인스 "인플레이션, 자본주의 체제 파괴"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와 관련된 책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보자. 인용이 조금 길지만 중요하니 그대로 싣는다.

"레닌은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공언했다고 한다. 정부는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과정을 통해 시민이 갖고 있는 부(富)의 주요 부분을 비밀리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게 빼앗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정부는 그들의 부를 그냥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궁핍하게 만들고 일부를 부자로 만든다.

이처럼 부의 자의적 재배치를 목도(目睹)한다는 것은 개인의 안전은 물론 분배의 형평성에 대한 신뢰에도 타격을 가한다. 인플레이션으로 ··· 엄청난 행운을 얻은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으로 폭리를 취한 '부당이득자(profiteer)'가 된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빈곤해진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을 증오하는데, 그 증오가 그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증오에 결코 못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매 달 통화의 실질 가치가 크게 변동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토대를 형성하는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모든 영구적인 관계는 완전히 무질서해지고 거의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부를 얻는 과정은 도박과 복권으로 전락한다.

레닌은 확실히 옳다.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사회의 기존 기반을 뒤집는 더 미묘하고 확실한 수단은 없다. 이 과정은 경제법의 모든 숨겨진 힘을 파괴의 편에 서게 하고, 백만 명 중 한 사람도 진단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케인스와 카네티의 사유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카네티가 정치학적ㆍ철학적인 반면 케인스는 철저하게 경제적이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에 관한 한 그들의 시각에는 공통점이 많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인플레이션이 대단히 파괴적이며 결코 경제 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네티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엄격하고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군중 현상"이라 했고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를 유도한다"는 의미의 레닌의 말을 인용한 뒤 "그가 옳다"고까지 했다.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사회의 기존 기반을 뒤집는 더 미묘하고 확실한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프리츠 랑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박사, 마부제 박사'를 가리켜 ‘당대를 기록한 문서’라 표현했다.
프리츠 랑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박사, 마부제 박사'를 가리켜 '당대를 기록한 문서'라 표현했다.

영화 <도박사, 마부제 박사(Dr. Mabuse, Der Spieler)>는 이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를 대표한다. 1922년 무성영화 시대 때 독일의 표현주의 명장으로 불리던 프리츠 랑(Fritz Kang) 감독이 만든 스릴러물이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이미 '명감독'이라는 말을 듣던 그였다. 그런데 이 영화로 그는 다시 한 번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박수를 받았다. 작가이자 영화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1947년 발간한 명저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학적 역사>에서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프리츠 랑 감독은 이 영화를 가리켜 '당대를 기록한 문서(a document about current world)'라 말했고 영화의 국제적인 성공에 대해서도 영화가 주는 다양한 스릴이 아닌 다큐멘터리의 미덕에 돌렸다."

'다큐의 성격을 갖는 표현주의 영화'. <도박사, 마부제 박사>에는 이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심지어 상반된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그리고 훗날 이 영화는, 랑 감독의 얘기대로, '한 시대를 담은 진정성 있는 영화'란 평가를 받는다. 랑 감독이 애정을 갖고 후속작을 여러 편 만든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대변되던 시절, 시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는 그 시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통해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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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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