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곁에서 ' 국정 경험 쌓는 게 낫다 '라는 정 총리의 권유로 청와대로
朴통의 머리역할로 입지 넓어져 …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감 댐 건설 산파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쓰루에게 정일권 총리가 다음 일자리로 영국 대사와 청와대 정무수석의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영국 대사자리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경제관료로서는 커리어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청와대 정무수석 자리는 차관급 자리였을 뿐 아니라, 그의 생리에 맞지 않는 '비서' 자리였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계속 다룰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청와대를 선택했다. 그 선택에는 "그래도 대통령 곁에서 국정의 큰 경험을 쌓는 것이 낫다"는 정 총리의 권유도 작용했다.
그전에는 장관을 했던 사람이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간 전례가 없었다. 당시 청와대는 비서실장 밑에 수석이라고는 차관급인 정무수석뿐이었다. 그가 정무수석으로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그 자리는 장관급으로 올려졌다. 그 후 청와대 수석의 직급은 차관급이든 장관급이든 사전에 정해놓지 않고 대통령의 의향과 새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가기 직전 직급을 고려하여 정했다.
쓰루는 정무수석이 된 후 평생 다니지 않던 가족여행을 하는 등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명예퇴직을 앞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때의 좌절이 오히려 훗날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1967년 양대 선거가 치러진 후, 쓰루는 청와대가 확대 개편되면서 신설된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수석의 역할은 지금과는 천양지차였다. 수석은 대통령의 수족일 뿐이었다. 대통령의 지시나 관심 사안을 챙겨주는 것에 그쳤다. 자기 생각이 있어도 대외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면 안 되었다.
자신이 무슨 거물인 양 나대는 것은 더더욱 금기였다. 박통이 수석에게 깊은 신임을 주지도 않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국정에 관해서는 특히 대외적으로는 함구가 기본이었다. 기자들도 청와대 수석에게 정책이나 권부의 내밀한 일 등을 묻지 않았다.
그도 수석을 하는 동안 대외적으로 발언을 자제했다. 그는 단순히 박통의 수족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박통의 머리 역할을 했다. 그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수석의 역할이었다. 그에 대한 박통의 신임과 더불어 수석의 역할은 커지고 위상은 높아져갔다.
쓰루가 상정한 수석의 역할은, 대통령이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결정(informed decision making)'을 내릴 수 있도록 국내외의 관련 자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집대성하여 대통령에게 적시에 정책 자료와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가 박통을 도운 대표적인 국정과제가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