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4 15:45 (월)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8) 한복 입고 ADB총회 참석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8) 한복 입고 ADB총회 참석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11.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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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얼 강조하고파'라는 설명에 외무부는 한일관계 걱정
일본의 침략 연상시키는 연설 내용은 정부 훈령으로 막판 삭제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1966년 11월 24일부터 도쿄에서 ADB(아시아개발은행)의 창립총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ADB는 매년 막대한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뜨는 해' 일본이 주도하여 만들고 있었다.

쓰루가 이사국(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국내 지식인과 청년들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난 반대 운동을 투옥 등으로 무자비하게 억누르는 등 천신만고 끝에 한일 국교를 정상화한 지 1년 반도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쓰루가 도쿄로 출국한 23일 밤, 외무부와 주일 한국대사관에 작지 않은 소란이 일었다. 쓰루가 다음 날 총회에서 읽을 연설문을 외무부가 입수했는데, 거기에 '문제적 발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대목은 이랬다. "본인은 학창 시절에 A 학점을 좋아했고 F 학점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인은 F를 좋아하고 A를 싫어하게 됐습니다. 이는 F가 자유(Freedom)의 첫 자이고, 반면 A는 침략(Aggression)의 첫 자인 까닭입니다. 또한 본인이 젊었을 때 P자는 플레이보이나 포커게임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본인이 정치가가 된 뒤 P는 평화(Peace), 번영(Prosperity), 발전(Progress)을 의미하는 말이 됐습니다. 이 3P야말로 아시아인이 오랫동안 희구하던 염원이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의 경제개발을 위한다며 벌이는 돈 잔치에서 일본의 침략을 연상시키는 멘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도발은 그의 또 다른 닉네임이었다!

외무부와 주일 대사관 사이에 밤새 전문이 오간 끝에 '대한민국 정부 훈령'으로 문제의 대목을 삭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음 날 연설에서 그 문제적 대목은 빠졌다. 쓰루는 다른 이들에게 "그것이 꼭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참 모두들 유머를 모른다 말이야……"라며 서운해했다고 한다.

한복 차림의 쓰루에게 기자가 "왜 한복을 입고 일본에 가느냐"고 묻자 "때와 장소가 일본이니만큼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위 선양의 일환이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해 외무부에 비상이 걸렸다. 사진은 1966년 일본에서 열린 ADB총회에서 연설하는 김학렬 당시 재무부장관.

연설문 불 끄기로 외무부나 주일 대사관이 안도의 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큰일 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쓰루의 한복 출국이 그것이었다. 한복 차림의 쓰루에게 기자가 "왜 한복을 입고 일본에 가느냐"고 묻자 "때와 장소가 일본이니만큼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위 선양의 일환이다"라고 자랑스레 설명했다.

그리고 "내일 일본 천황 주최의 파티에도 한복 차림으로 갈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재무부 대변인에게는 김수환 추기경과 같이 학병에 끌려갔던 얘기를 하면서 "이제 내가 한국의 재무장관이 되었으니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한복을 입고 한민족의 얼을 과시하고 싶단 말이야"라고 배경 설명을 했다.

이 또한 ADB 창립총회의 잔치 분위기를 흐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로 어렵사리 마련한 양국 간 협력 모멘텀을 떨어뜨릴 수 있는 행동이었다. 외무부 본부가 서둘러 마련한 '한복을 입지 말라'는 정부 훈령이 쓰루에게 제시간에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24일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32개국 대표 52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ADB 총회에서 쓰루는 한복 차림으로 연설을 했다. 그 총회 한복 사진은 그날 일간지 1면을 장식했다.

쓰루의 한복에 관해 여야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여당은 '한 해 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으로부터의 투자와 자금 도입이 겨우 활성화되려는 판국에 왜 양국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짓을 하느냐'는 것이고, 야당은 '일본 한복판에서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주다니, 거참 잘했다'며 불난 집에 부채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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