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견때 '왕초'겨냥한 발언 관가 흔들어…기자들 묻지도 않았는데 "난 돈 안받아"
1966년 9월 한국비료 밀수사건이 터졌다. 한국비료가 (관세품인) 사카린을 (면세품인) 공장 건설자재라면서 관세를 물지 않고 밀수한 사건이었다.
한국비료는 한국 최대규모의 비료 공장으로, 현금차관을 받아온 대형 외자기업이었다. 한국비료는 정경유착, 부실 경영, 외채 상환 불능 등 현금차관 업체가 안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받고 있는 터였다.
거기에 밀수까지 저질렀으니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빨리 찾아내어 언론의 주목을 피해야 했다. 마침 1967년 선거의 해를 앞두고 박통이 밀수 등 5 대 사회악을 쓸어내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정권의 깨끗함을 강조할 때였다. 당시 분위기로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정권의 부패와 비리 문제로 번질 기세였다.
9월 22일에는 야당 한국독립당(한독당) 김두한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도중에 국무위원석을 향해 사카린이 섞인 똥물을 뿌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9월 26일 전격적으로 족집게 개각이 단행됐다. 박통의 선택은 관세 행정 부처인 재무부 장관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김정렴 재무장관이 물러난 자리는 쓰루가 이어받았다.
그날의 개각에서 언론이 관심을 가진 것은 쓰루가 최연소 재무장관으로 영전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재무장관을 4명씩이나 갈아치우면서까지 '장기영 팀'의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왕초가, 왜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쓰루를 재무장관으로 받아들였냐 하는 게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수석차관이자 최장수(3년 3개월) 차관으로 그의 입각이 어느 정도 점쳐지기는 했지만, 재무장관 자리는 쓰루 자신도 뜻밖이었다. 그의 재무장관 입각에 관한 여러 가지 짐작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당시 왕초가 자기 바람대로 재무장관을 임명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비리로 많은 비판을 받던 한국비료에 처음 현금차관을 허가해준 장본인이 왕초 자신이었다. 왕초 입장에서는 하마터면 자신이 한국비료 사건 처리의 물살에 휩쓸려 물러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느 때처럼 후임 재무장관에 관해 박통에게 '누가 좋다, 누구는 안 된다'는 식으로 자기 의향을 내비칠 상황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분석은 장기영 씨가 정치적으로 너무 커지는 데에 대한 주변, 특히 정일권 총리의 견제구라는 것이다. 정일권 총리는 쓰루를 좋게 보고 아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장관 취임 첫 기자회견부터 쓰루는 여느 장관과 많이 달랐다. 회견은 별로 특이한 점 없이 시작되었다. 한국비료 사건 후속 조치로 재무장관이 된 사람답게 "밀수는 후진 경제 발전에 암적 존재이다. 앞으로 밀수 행위를 방지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겠다"며, 관세 업무를 책임지는 신임 장관으로서 의례적인 포부를 밝혔다. (그가 재무장관으로서 밀수와 탈세를 근절하는 것보다 더 심중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 것은 그 며칠 후였다.)
그다음부터 기자회견이 특이해지기 시작했다. 밀수 근절 발언 후 쓰루는 생뚱맞게 바로 자기의 자랑으로 넘어갔다. 그는 기자들에게 "2차 5개년 계획 수립에 대한 공으로 재무장관이 되었다"고 자신의 재무장관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새로 장관이 된 사람이 '내가 그동안 잘해서 장관이 되었다'며 자랑삼아 자신의 입각 배경을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경우는, 적어도 필자가 알기로는 전무후무하다.) 그러고는 대뜸 아무도 묻지도 않았는데 "재무장관 중책을 업적으로 쌓아 올려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우겠다"고 가슴을 펴며 말하였다.
왕초 휘하에서 재무장관은 파리 목숨이었다. 왕초는 자신에 대한 순종은 기본으로 여겼고, 성에 차지 않으면 재깍재깍 갈아치웠다. 장기영팀 재무장관의 평균 임기는 7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 앞에서 재무장관으로 장수하겠다는 포부 표명은 왕초하고 잘 지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왕초와 자기 중에 '누가 먼저 자리를 내놓나 보자'는 공개적 도전이었던 거다.
왕초가 부총리로 온 뒤 뒷방 마님으로 밀려난 2년여 동안 차관 행세를 제대로 못 하면서 쓰루가 얼마나 와신상담했는지, 또한 왕초 험담을 얼마나 많이 하고 다녔는지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언론은 두 사람 공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즐겨 들먹이며 둘의 기 싸움에 부채질을 했다. 그래서 그의 '재무장관 장수하겠다'는 말은 이제 왕초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엿한 재무장관이 되었으니, 업적으로 다시 한번 날려보겠다는 공개적 포부이기도 했다.
이어서 쓰루는 "나에게 돈을 가져오는 사람은 그다음 날로 파면될 것이다"라는 말을 던졌다. 어느 기자도 인사 원칙 등에 관해 묻지 않았는데 갑자기 툭 나온 그 발언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그 진의에 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중 가장 유력한 해석은, '다른 사람은 뇌물을 받고 인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그런 뇌물은 인사에 도움은커녕 패가망신을 초래하게 될 거라는 겁박'이었다는 것이다. 관료이건 기자이건 기획원 일에 익숙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묘한 인사 발언이 누구에 관한,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