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원 차관까지 쓰루는 정치인과 교분이나 타협이 없는 '정통관료'
쓰루는 성장 정책엔 공감했지만 '경제안정'에도 비중 두는 원칙 고수
장기영과 김학렬은 서로 너무 달랐다. 하지만 정책관에 공통점도 있었다. 초기 산업화 시대를 이끈 만큼, 두 사람 모두 성장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왕초는 상대적으로 '성장 일변도'였고, 쓰루는 '성장 속의 안정'을 꾀한 편이었다.
이 정책관의 차이 또한 두 사람의 다른 배경 때문인지 모른다. 왕초는 자기 혼자 일가를 이룬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어려움이 있으면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에게 한국 경제의 급선무는 성장이었다. 안정은 성장을 이룩한 후에 따져볼 일이었다. 쓰루라고 성장을 바라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 정도가 문제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줄곧 물자 부족과 그에 따른 물가 불안은 경제정책에 가장 큰 골칫거리였고, 경제 안정은 미국 원조 당국이 가장 고집스럽게 강요해온 정책 기조였다. 그것이 '성장 속의 안정'이라는 정책 기조를 그가 굳히게 된 배경이었다. 왕초에게 성장, 외자, 건설, 민간 참여가 중요했던 만큼, 쓰루에게는 안정, 내자, 재정 건전성, 민간 통제가 중요했다. 따라서 쓰루의 눈에는 외자 도입, 산업화, 투자, 성장으로 내닫는 왕초의 경제정책은 불안한 구석투성이였다.
업계와의 관계도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왕초는 업계와의 의사소통 채널을 늘 열어놓고 있었다.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주는 외자 도입뿐 아니라 정부가 관리하는 주요 물자의 가격 책정 등에서 업계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들의 입장을 감안했다.
당시는 업자와의 유착이나 부패가 만연한 때였다. 왕초의 '긴밀한' 관민 협조관계는 정통 관료 쓰루의 눈에는 부적절 내지 불투명한 거래 관계로 비쳤을 것이다. '까마귀가 까마귀와 어울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쓰루는 '관료(백로)야, 업계(까마귀)를 멀리해라'는 결벽증이 심했다.
정치권과의 관계로 가면 왕초 장관과 쓰루 차관 간의 차이는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왕초의 입장에서 정치권은 국정 추진을 위한 파트너였다. 현실주의자인 왕초는 필요하면 정치권과 언제든 타협하였다. 원칙주의자 쓰루는 그러지 못했다. 정치인과의 교분이나 타협은 그의 머릿속에 있지 않았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국회에 간 것은 국회의 요구로 경제정책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서거나 정기국회에서 예산을 설명할 때가 고작이었다. 나중엔 안그랬지만 적어도 기획원 차관 때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