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렬 차관 "기업다운 기업 없다"며 정부가 돈 들여와 기간 산업 육성 강조
일본자본 유입은 경제의존 심화는 물론 통화유발로 인한 '경제불안정' 경계
왕초는 기발하고 과감한 아이디어로 기존 틀을 깨고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장기가 있었다.
1965년 9월의 (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를 낮게 하는) 금리 현실화 조치가 그 한 예다.
정책 기조를 수입 대체 산업화에서 수출 주도 산업화로 대전환하는 데 적임자였다.
쓰루는 계량화와 강력한 조정 및 추진력에 강점이 있었다. 그의 정책적 업적은 대부분 정책 기획 단계가 아니라 정책 집행 단계에 확보되었다. 기존의 틀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행정가였던 것이다. '쓰루표' 국가사업인 포항제철소 건설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뿐 아니라 심지어 그가 자랑하는 2차,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도 이미 정해진 기본 방향에 따라 전임자나 대통령이 정한 추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추진력과 수완을 보였다.
두 사람은 경제정책에 관한 생각도 많이 달랐다. '같은 부처, 같은 층에 장관과 차관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왕초는 '수출이든 투자든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구는 것은 민간이다', '정부의 역할은 민간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수출 주도의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출범시켰다.
정부가 시킨다고 민간기업이 수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수출이 돈벌이가 되면 정부가 하지 말라고 해도 민간기업이 수출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취임하자마자 민간기업이 수출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도록 관련 제도를 근원적으로 재편해나갔다. 이런 연유로 그가 주로 동원한 정책 수단은 환율·금리 등 금융정책이었다.
쓰루는 경제 발전을 위한 민간기업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기업다운 기업이 없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생각하는 경제개발정책은 정부가 주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세수 등) 내자이든 (원조나 차관 등) 외자이든, 정부 신용으로 자본을 구하여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기간산업을 일으키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건설하도록 해서, 그것이 민간경제를 일으켜 경제 발전 기반을 구축하도록 한다는 것이 그의 정책관의 큰 흐름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그가 주로 동원한 정책 수단은 재정 투융자, 예산 등 재정이었고, 그가 추진에 집중한 국가과제도 포항제철소,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 건설사업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정책관이 가장 크게 달랐던 것은 외자, 특히 상업차관에 대한 입장이었다. 당시는 내자이건 외자이건 투자 재원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물꼬를 튼 (상업차관 등) 외자 유입을 생산 기반 구축에 활용하게 된 것에 왕초의 공이 크다. 일본 자본에 대한 의존, 외채 누증, 외자 부실기업 발생 등 각종 병폐에 대한 비판에도 그는 "부채도 자산이다. 차관이든 뭐든 다다익선이다"라고 당당히 맞섰다.
반면 경제관료로서 줄곧 예산을 담당해왔던 쓰루에게 일본 자본 유입은 일본 경제에 대한 의존 심화를 의미했고, 현금차관 도입은 통화 유발로 인한 경제 안정 기반의 훼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차관 등 외자는 선별적으로 조심스럽게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도 외자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정적이고 외채 상환 부담이 덜한 공공차관을 선호했다. 반대로 불안정하고 이자율이 높은 상업 차관은 경원시하였다. 상업차관 중에서도 일본의 상업차관, 특히 현금차관을 극히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