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떠난 허전한 마음을 잊으려는 듯 외국 전문 서적 독파하며 중무장
부처 합동회의 주도권 쥐고 쓰루의생각대로 경제계획안 일사천리추진
1964년 5월,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 씨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으로 취임했다. 장 씨는 마치 조직의 우두머리처럼 부하 직원을 불도저식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는 '왕초'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왕초 부총리는 쓰루 차관을 외자 도입 등 '영양가' 있는 업무에서 배제하고는 그에게 제2차 5개년 계획의 총괄 역할 등 별 영양가 없는 업무를 맡겼다. 그 일을 맡기는 왕초나 그 일을 떠안은 쓰루를 포함한 그 누구도 2차 계획의 수립과 성공적인 추진이 쓰루라는 부총리를 태어나게 하는 발판이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왕초에 의해 뒷방 마님 신세가 된 허전함을 잊으려는 듯, 쓰루는 새 임무를 향해 처음부터 전력 질주했다. 경제개발계획 수립의 총괄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주먹구구, 맨땅에 헤딩 식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1차 5개년 계획 수립 시 사실상 총괄 역할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새 임무의 첫걸음은 관련된 지식을 한국의 학자, 관료, 전문가 그 누구보다 더 많이, 깊고 넓게 쌓는 일이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생활신조였다.) 광화문 네거리의 동과 서 양쪽에 있던 범문사·범한사 등 외국도서 전문서점, 대형 도서관 등지에서 구할 수 있는 관련 서적을 모조리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전문서적으로 접한 세계 석학들은 래그나 넉시(Ragnar Nurkse), 얀 틴베르헌(Jan Tinbergen) 등이다.
어느 날, 그의 지식 욕구를 익히 알고 있는 젊은 직원이 해외출장 갔다 오는 길에 1965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을 사 왔다. 스탠퍼드대학의 제럴드 마이어(Gerald Meier) 교수가 쓴 『Leading Issues in Economic Development』는 쓰루가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경제개발에 관한 책이었다. 밤새워 책을 훑고 난 그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그 직원을 조용히 불렀다.
"자네, 그 책 몇 권 가지고 왔나?"
"한 권은 차관님 드리고 한 권 남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아무한테도 그 책 보여주지 마."
남보다 앞서 알아야 하고, 가급적 그 자신만 알아야 한다는 새 지식에 대한 그 특유의 독점욕이 발동한 것이다.
그는 기획원 담당 관료들을 세계은행의 EDI(Economic Development Institute·경제개발원) 등에 연수 보내는 등 부처 내 기획 능력 제고에도 애썼다. 이로써 쓰루 차관 이하 기획원 내 기획 요원들이 여타 부처들을 2차 5개년 계획으로 끌고 갈 준비는 마친 셈이었다. 이제 2차 계획은 쓰루의 지휘 아래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관련 회의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성 합동위원회'를 두었다. 공식적으로는 경제부처 장관, 공화당 대표, USOM, 그리고 외국 자문단 대표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사실상 각 부처 차관들이 대참하였고, 경제부처 수석 차관인 쓰루가 회의를 주재했다. 처음에는 월 1~2회 정도 열렸으나, 계획 수립이 본격화됨에 따라 주 1~2회, 종반에 가서는 매일 열렸다.
이 회의를 거의 실황 중계하듯 묘사한 고 최우석 중앙일보 주필의 기록물이 있어 여기에 그대로 전한다.
"김 차관은 일을 대(竹)를 쪼개듯이 쫙 밀어붙였다. …… 2차 계획의 마무리 작업을 김 차관이 맡았다. …… 회의 개회시간이 아침 10시 30분이어서 'Ten Thirty Meeting'이라 불렀다. 때로는 외국인 고문들도 참석하여 동시통역으로 진행됐다.
숫자가 가득 쓰인 회의 자료를 넘기면서 김 차관이 회의를 주재하는데, 이론에 밝고 논리도 정연한 데다 독설로 소문이 널리 나 있는 터라 모두들 겁먹은 분위기였다. 준비도 많이 하고 나오므로 섣불리 이의를 제기했다간 타박을 맞기 일쑤였다.
회의는 김 차관 의도대로 빨리 돌아갔다. 한번은 안건 중에 통신시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화세 신설을 검토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체신부 차관이 무슨 말을 하려 하자 김 차관이 전광석화처럼 '오늘 회의 안건 중에 전화세 조항은 프린트에서 삭제하겠습니다. 다음' 하고 말문을 막아버렸다.
매사 그런 식으로 회의를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이끌어나갔다. 절대 구질구질한 이의를 못 달게 했다. 김 차관의 서슬 때문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론 불만도 많았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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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경기중,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2020년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