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IMF총회서 미국의 추가 원조 받으려던 전략 어그러져
미국"돈 주고 식량도 주는데 우리돈으로 다른 나라 곡물 사나"
아무리 한미 간 경제 협의체가 제도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해도, 2년 동안 중단되었던 협의 체제가하루아침에 협력 분위기로 복원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불씨는 미국 일변도의 경협 파트너를 다변화하려는 한국 정부의 시도가 제공했다. 그 불똥은 쓰루 부원장에게 튀었다.
1963년 9월 쓰루가 워싱턴에서 매년 개최되는 IMF(국제통화기금) 총회에 참석하였을 때였다. 공식적인 출장 목적은 IMF 총회에서 관계국들에 한국의 거시정책, 즉 재정과 금융정책 현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해 미국의 추가 원조와 다음 해의 원조, 특히 무상 식량 원조 확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루 팀이 워싱턴에 도착한 날, 한국 신문에 '우리 정부가 캐나다에서 식량 원조를 받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리고 말았다.뒤통수를 맞은 킬렌 USOM 처장이 즉각 워싱턴으로 불려왔다. 비상이 걸린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거듭 해명을 하고, 워싱턴에 가 있던 쓰루 팀이 사실이 아니라고 백방으로 알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복원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 정부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두 해 이어진 극심한 흉작으로 곡물 가격이 치솟고 있었고, 게다가 63년은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과 대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주곡인 쌀의 부족이나 쌀값 앙등으로 인한 악성 인플레 재현은 정치적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식량 원조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여타 나라로부터 곡물 수입을 할 수 밖에 없는 심각한 공급 부족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한국 정부 사정일 뿐, 미국 정부로서는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었다. '우리는 공짜로 식량 주고, 돈(원조) 주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우대금리의 차관까지 주고 있는데, 우리한테 상의도 없이 우리가 준 돈으로 다른 나라에서 비싼 식량을 사들이고, 우리보다 고이자율의 차관 이자를 갚는 데에 쓴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할 말이 없었다. 한바탕 해프닝 끝에 미국 관료들이 한국 기자들에게 "김 부원장과의 회담은 화기애애했다"라고 말해주는 선에서 해프닝을 마무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10월 28일 한 달 만에 귀국하는 쓰루는 빈털터리였다. 스스로 "우리의 재정안정계획에 미국은 회의적인 태도를 표시하였고, 1500만 달러(1963년도) 추가 원조 문제는 킬렌 USOM 처장이 귀임한 다음 한국에서 결정하기로 했다"며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로 '거짓말하지 않는 한국 관료'라는 쓰루의 대외 이미지에 큰 손상이 가고 말았다. (그 명성은 쓰루가 부총리가 되고 나서야 완전 복원이 가능했다.) 그 뒤에도 USOM과의 협의는 여전히 쓰루가 맡았지만, ECC 공식 채널을 통한 협의는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