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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 더 본드 ②재무장관의 위세
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 더 본드 ②재무장관의 위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3.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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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준비위원회 이사회 의장도 겸직해 1차대전 '戰費마련 인플레'엔 꺼려
증세와 공채로 조달키로하고 찰리 채플린 등 유명배우를 채권판매에 동원
2000만명이 전시 공채 사들여 발행 목표액 170억 달러 '완판' 대흥행 기록

■ 4조 달러 공채 팔아야 전쟁 승리

그래도 연준의 운영 방식이 보통 때와 같았다면 얘기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일부 또는 적잖은 자금을 연준은행을 통해 조달했을 테고 그렇다면 은행 역시 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17년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 기간이었다. 아직은 '정부로부터의 자유'는 요원했다. 정부 재무장관이 연준을 이끌었다.

연준법 통과 뒤 실제로 연준이 작동될 때까지 재무장관이 연준이사회 의장을 겸하던 전통이 계속됐다. 통화ㆍ재정정책은 연준위원회나 연준은행이 아닌 정부의 손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윌리엄 G. 맥아두(William G. McAdoo). 재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연준도 아우르는, 그야말로 '권력 중 권력'이라 할 만 했다. 그런 그가 돈을 찍어내는 것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증세(增稅)와 공채 판매를 통한 '대출'이었다. 둘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증세는 늘 한계와 반발이 있고, 공채 판매도 국민의 적극적인 동조 없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은, 어느 정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혼합형'이었다. 세금과 공채 판매 모두를 동원해 자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목표액은 250억 달러 전후. 처음에는 50:50과 33:66의 두 의견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33:66의 혼합형으로 결정됐다. 1/3은 세금으로, 2/3는 채권 판매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결정에는 재무장관 맥아두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전시 자금을 마련하며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17년 영국에 대한 해상 봉쇄를 위해 독일이 막강한 잠수함 전력을 활용, ‘무제한 잠수함전’을 선포하고(④) 러시아에서의 2월 혁명(⑤)으로 독일에 대한 양동작전이 어려워지자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1917년 영국에 대한 해상 봉쇄를 위해 독일이 막강한 잠수함 전력을 활용, '무제한 잠수함전'을 선포하고 러시아에서의 2월 혁명으로 독일에 대한 양동작전이 어려워지자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사진=무제한 잠수함전.

"모든 위대한 전쟁은 반드시 대중 운동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십자군 전쟁처럼 그것은 낭만주의의 강력한 흐름을 탄다."

결론적으로 그는 세금보다 많은 돈을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거둬들여야 한다고 봤다. 그러기 위해 대중 차원의 운동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 대중운동을 통해 전쟁의 당위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일 때 국민은 돈을 내고 하나가 되고 정부와 군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공채는 반드시 완판돼야 했고 가급적 많은 국민이 참여해야 했다.

러시아의 2월 혁명.
러시아의 2월 혁명.

리버티본드는 윌슨의 참전 선언 직후 탄생한다. 전시공채을 발행하기 위한 긴급대출법이 통과된 것이 1917년 4월 24일이었으니 윌슨이 참전을 선언한지 약 3주가 지난 뒤였다.

 1차 발행 때는 이자 3.5%에 모금액 19억 달러였다. 이후 채권은 모두 세 차례 추가로 발행됐다. 2차는 1917년 10월 1일 이자 4%에 38억 달러, 3차는 1918년 4월 5일 이자 4.15%에 41억 달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4차는 1918년 9월 28일 4.25%에 69억 달러를 발행했다.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 차례 더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때는 '리버티' 대신 '빅토리'라는 이름을 썼다.

전시공채의 판매는 성공적이었다. 네 차례 발행에 목표액 170억 달러를 모두 달성했다. 완판에 대한 우려를 잠재운 놀라운 결과였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참여자였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공채 매입자는 무려 2000만 명. 당시 미국 내 가구 수가 2400만이었으니 대부분의 가구에서 채권 매입에 참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로써 미국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맥아두의 말대로, 대중운동이 됐고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가 나라를 휩쓸었다.

세금도 잘 걷혔다. 당초 공채를 통한 경비 조달 목표는 170억 달러로, 이는 총 모금 목표액의 2/3 규모였다. 세수도 성공적이었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은 88억 달러로 공채판매액 의 절반에 해당되는 규모다. 이 자금은 요즘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2015년 연준은 이를 약 6조3000억 달러로 추정했다. 세금 2조100억 달러, 채권 발행액이 4조2000억 달러 규모였던 것이다. 이를 2년 만에 거둬들였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당대 최고의 영화계 스타들인 채플린, 페어뱅크스, 픽포드가 이 '대단한 업적'에 동참했다 할 수 있다. '동참했다'보다는 '동원됐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채플린은 태생적으로 심신의 자유를 갈구하는 '집시의 후예'였다. 반전주의자요, 평화주의자로, 또 반(反)노동적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괴롭힘 당한 이면에는 이 같은 그의 성향이 있었던 것이다.

■ "전쟁은 대중 운동"

이런 그가 엄청난 규모의 대중 앞에 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같은 연설을 한 적이 없다"고 한 그는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월스트리트 대로에 모여든 2만 군중은 영화계의 스타 중 스타인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던 대배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채플린은 이렇게 연설했다.

"인간의 삶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번 세 번째 리버티본드에 대해 이자율 같은 것은 잊으십시오. 또 우리가 채권을 갖고 뭘 하지, 어디다 쓰지, 이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 우리에게는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위대한 육해군을 지원해야 할 돈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독일군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러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 늙은 악마 카이저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자금동원의 책임을 맡았던 윌리엄 G. 맥아두(William G. McAdoo) 미국 재무장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자금동원의 책임을 맡았던 윌리엄 G. 맥아두(William G. McAdoo) 미국 재무장관.

채플린과 페어뱅크스는 배우 중 배우, 스타 중 스타였다. 군중을, 손에 쥔 호두알처럼 쥐락펴락 했음이 분명하다. 신문은,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흥을 받은 군중은 웃고 소리치고 박수를 쳤다"고 썼다. "연설을 듣던 중 여러 명의 여성이 혼절했고 구급차가 이들을 급히 실어 날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채플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플린의 공(功)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영화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가 다룰 영화 <더 본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가 판매했던 리버티본드에 대한 영화다. 또 제목을 통해 추정했을 수도 있을 텐데, 이 영화는 정부정책 홍보 영화다. 채플린이 정책홍보영화를 만들었다고? 그렇다. 수백편의 그의 작품 중 유일할 것이다. 국내 영화계는 이 영화에 <공채>라는 이름의 번역어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원어 제목 <더 본드>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본드(Bond)'라는 제목이 중의적(重義的)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마지막 의문을 던져보자. 왜 채플린은 리버티본드라는 전시공채 판매와 홍보에 열을 올렸던 것일까? 홍보영화까지 만들어야 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있다. 당연히 있다. 다음 글부터는 이 문제를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를 연결시키며 설명하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연준, 그리고 채플린과 그를 월스트리트로 이끈 보이지 않은 힘의 뒤얽힌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그를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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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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