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에 ' SUR ' 이란 국가의 영문 약어가 떴지만 이 나라 아는 기자 아무도 없을 정도로 낯설어
선수 이름도 몰라 올림픽 취재팀에 비상 … 1년전 팬암대회 우승보도한 타임誌기사 번역에 법석
사진기자, 우승 장면 못찍어 머쓱 … 네스티, 수리남 영웅에 … 기념우표에 그의 이름 딴 체육관도
앤서니 네스티(Anthony Nesty)는 올림픽 수영 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다. '사상 첫'이라는 타이틀은 영원하다. 그 사건이 바로 서울 올림픽에서, 잠실 실내수영장에서 탄생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그 현장에 있었다. 기자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혜가 바로 '현장'이다. 대한민국 체육부 기자들에게 서울 올림픽 취재는 큰 영광이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전까지 올림픽 취재 경험이 있던 기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올림픽에 가도 우리나라 선수들만 취재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최국이 되니 모든 경기, 모든 선수들이 취재대상이었다.
중앙일보 체육부도 오랜 기간 올림픽 취재를 준비했다. 개막 한 달 전부터는 아예 신문사 앞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합숙을 했다. 종목별로 예상 답안지(?)를 마련해서 미리 기사를 써놓기도 했다. 예를 들면 금메달이 예상되는 선수의 프로필 기사 같은 것이다. 당시에 나는 사회부 기자였지만 체육부 선배들이 얼마나 고생하는 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1988년 9월21일. 남자 접영 100m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 선수가 없는 이 경기에 사회부 기자까지 투입된 것은 매트 비욘디(미국) 때문이었다. 비욘디는 7관왕까지 노리는 스타였다.
경기가 시작됐다. 50m 반환점을 돌았을 때 전광판에는 당연히(?) 5번 레인의 비욘디가 1위로 찍혔다. 그런데 비욘디가 터치패드를 찍고 나서 전광판을 돌아보더니 환호를 하지 않았다. 뭐지? 전광판을 보니 비욘디가 2위였고, 1위는 3번 레인의 앤서니 네스티였다. 네스티가 누구야? 국가명인 'SUR'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을 때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겨우 SUR이 수리남의 약자라는 건 알아냈으나 처음 듣는 나라.
요즘 말로 '멘붕'이었다.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뛰었다. 1987년 팬암 대회에서 네스티가 금메달을 땄을 때 'TIME'에 기사가 났었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복사한 한 장짜리 기사에 열 명 정도의 기자가 들러붙었다. 인구가 39만 명인 남미의 소국 수리남에는 정식 수영장이 하나 밖에 없다는 등 열심히 베껴서 기사를 송고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사진부 선배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 네스티의 사진을 못 찍었다는 것이다. 사진기자들도 당연히 비욘디가 우승하는 줄 알고 5번 레인에 포커스를 맞춰놓고 기다렸으니 꽝이었다. 네스티가 환호라도 하고, 좋아했으면 얼른 찍었을 텐데 그나마 조용히 그냥 밖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사진기자들은 한동안 누가 우승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네스티의 우승 장면 사진이 없다.
나중에 기자회견장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 네스티는 매우 조용한 선수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크게 웃지도 않고, 말도 차분했다. 잘해야 동메달을 기대했는데 1위로 들어와 자기도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네스티는 수리남의 영웅이 됐다. 기념우표와 기념주화도 나왔고, 네스티 체육관이 생겼다는 뉴스를 봤다. 나에게 네스티는 단순한 올림픽의 영웅이 아니다.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특별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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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6년 중앙일보 입사. 사회부-경제부 거쳐 93년 3월부터 체육부 기자 시작.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주요 종목 취재를 했으며 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한일 월드컵,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을 현장 취재했다. 중앙일보 체육부장 시절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으며Jtbc 초대 문화스포츠부장을 거쳐 2013년 중앙북스 상무로 퇴직했다. 현재 1인 출판사 'LiSa' 대표이며 저서로 부부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