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6 08:55 (일)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8) 최연소 재무장관의 좌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8) 최연소 재무장관의 좌절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04.13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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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 장기영 부총리와의 불화로 장관 취임 석달 만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밀려나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의 통치철학 공유…관료틀 벗고 시야 넓혀 재도약 발판으로
경제개발계획에 미국 시큰둥…원조로 버티던 경제는'화폐개혁' 부작용 겹쳐 나락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잘나가는 차관'이었던 김학렬은 어느 것 하나 맞는 것 없는 '불도저 부총리' 장기영 밑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명품 정책'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을 주도한다.

1966년 9월 최연소 재무장관으로 영전한 그는 의욕적으로 나서지만, 불과 석달 만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물러앉아야 했다. 왕초 부총리와의 불화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그 후 청와대에서의 2년 반동안 박통과 통치철학을 공유하면서 그는 전문관료의 껍질을 깨고 나와 정치 및 사회 부문과 교감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재무장관 낙마가 훗날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된 것이다. 그는 '준비된 부총리'였다.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1963년 민정 이양이 될 때까지 한국 경제는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5·16 쿠데타 직후부터 가라앉은 활력은 고집스럽게 주저앉아 있었고, 외환 보유고는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고질적인 물자와 외환 부족은 인플레를 재현하고 있었고, 길거리의 실업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병색 짙은 경제 상황의 바탕에는 군사정권의 과욕이 빚은 정책 실패와 한국 경제의 젖줄인 미국과의 협력 체제 와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문제였다. 해방 후 줄곧 한국 경제를 지탱해주고 있던 미국은 당시 소련 등 계획경제 국가와의 체제 경쟁에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무리 경제개발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산권에서 하듯) 정부가 계획하고 산업화를 주도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66년 9월 최연소 재무장관으로 영전한 그는 의욕적으로 나서지만, 불과 석달 만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물러앉아야 했다. 왕초 부총리와의 불화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낙선 상공장관에 훈장을 주는 모습, 두 사람 사이로 김학렬 부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국가기록원.
1966년 9월 최연소 재무장관으로 영전한 그는 의욕적으로 나서지만, 불과 석달 만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물러앉아야 했다. 왕초 부총리와의 불화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진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낙선 국세청장에게 훈장을 주는 모습. 두 사람 사이로 오른쪽에 김학렬 부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국가기록원.

미국과 그 원조 당국은 군사정권의 정책에 근원적인 불만을 품고 있었다. 미국 정부의 눈에는 군사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이라고 내놓은 것이 과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군사정권의 위시리스트에 불과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 1958년부터 줄어온 미국 원조는 감소세가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호의적인 재정 지원을 전제로 수립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 계산된, 설익은 계획이었다.

5개년 계획에 대해 미국의 협력은커녕 이해조차 받지 못하게 되자, 다급해진 군사정권은 1962년 6월 별다른 준비도 없이 화폐 개혁(옛 돈 10환을 새 돈 1원으로 단위를 낮추는 디노미네이션)을 감행했다. 국방과 경제에 막대한 원조를 주는 미국과 사전협의도 없었다.

'화폐 개혁을 하면 장롱 속의 돈이 은행 등 제도권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 그것을 산업화의 자금으로 쓰자'는 순진한 취지에서 벌인 일이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경제에 혼란만 야기했을 뿐, 불안해진 사람들은 더욱 현금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뜩이나 불황인데 돈마저 돌지 않으니 경제가 올스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의 엄중한 경고(자금이동 동결 등)로 화폐 개혁에 수반된 모든 규제를 다시 되돌렸으나, 경제에 대한 손상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화폐 개혁이 자극한 물가 급등으로 경제는 더욱 미궁에 빠져들어 갔다.

하늘은 겨우 전쟁의 재해를 극복한 개도국 한국을 돕지 않았다. 마치 미국의 사주를 받은 듯 군사정권을 벌주고 있었다. 1960년에 이어 62년에도 극심하게 가뭄이 들어 추수를 망쳤다. (1962년도 농업 생산은 6%나 뒷걸음질 쳤다.) 군사정권에 토라진 미국의 PL480(미국의 농업 수출 진흥 및 원조법)을 통한 식량 원조는 더욱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흉년과 원조 감소라는 양 펀치에 연초부터 오르기 시작한 쌀값은 가을이 되어서는 폭등세를 보였다.

곡물뿐 아니라 제조업 관련 원자재, 기계 등 모든 수입을 위한 달러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물자도 부족했다. 유일하고도 믿을 만한 공급처는 미국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의 자본과 식량 등의 물자는 더욱 절대적인 게 되어갔다.

군사정권은 경제가 부하처럼 그들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를 것이라고 오판했다. 군사정권의 수뇌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은, 경제는 시장과 민간에 맡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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