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재무장관,'사세국장' 임명 배경 설명위해 기자회견 자청
"청탁,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직한 인물필요" 쓰루 발탁評
자유당 정권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 가운데 심각한 부정부패가 저질러지고 있었는데, 그 절정이 1960년 3·15 부정선거였다.
피 끓는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에 일반 시민까지 호응한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 등 집권 세력을 몰아내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했다.
이때 쓰루의 식구는 동숭동 서울대 법과대학을 길 하나를 두고 마주 보는 집에 살고 있었다.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위를 막는 경찰의 곤봉에 맞은 듯 이마와 흰 상의에 피가 낭자한 남자 대학생들이 담을 넘어 피신해 들어온 것을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필자 등 쓰루의 자식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61년 1월 25일, 민주당 정부의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쓰루 예산4과장을 사세국장 서리에 임명했다. 당시 사세국장은 지방의 징세조직들을 포함해 오늘날의 국세청장과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을 합친 것 같은 직위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의 자리였다.
"당시 재무부에는 사세국뿐만 아니라 관세국도 있었는데 자유당 정부 시절 내가 이재국장으로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니까 사세국, 관세국 모두가 하나의 독자적인 왕국이었어요. 해당 국장의 권한이 대단했죠. 장관이 국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어요. 그리고 두 국 모두 지방조직이 있어서 지방에까지 인맥이 다 닿아요."(김정렴 증언)
그런 자리에 쓰루를 앉힌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본인의 성격이나 배경을 보아도 상상 밖의 일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인을 무식하고 부패한 무리로 간주하던 쓰루가 (정치와 정치인을 무시했다고 쓰루를 욕하지는 말라. 쓰루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야당 민주당에 줄을 대고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더구나 정부 돈을 쓰는 예산 쪽이면 몰라도, 돈(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해본 적도 없었다.
예산국 동료들은 그런 쓰루가 다른 자리도 아니고 사세국장에 임명된 배경에 대해서 그의 청렴성이나 공무원으로서의 철저한 소명의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혁명으로 들어선 여느 정권처럼 민주당도 부정부패 등 '부끄러운 과거' 청산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당시 재무부 일 중에 가장 썩었다고 만인의 지탄을 받던 곳이 국세행정이었다. 김영선 재무장관은 사람을 바꿔 부패한 세무행정을 일소하겠다고 작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무 공무원 전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 그 수장을 세무나 정치와 무관하되 개혁적이고, 누구의 청탁이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직한 인물을 들여와 단칼에 세무행정 개혁을 이루겠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가 주목한 적임자가 바로 쓰루였던 것이다.
김 장관은 쓰루의 사세국장 발탁 배경을 기자들에게 직접 설명했다. 일개 국장의 임명을 기자회견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번 인사는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여 세정의 쇄신을 위한 것'이라며 '4월 혁명 후 아직도 자각하지 못한 일부 부패한 세무 공무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라고 신임 사세국장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더 이상 이한빈 예산국장이 지휘하는 기업회계제도 도입, 성과주의 예산 등 예산 개혁 작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아쉬워하면서도, 쓰루는 깨끗한 세무행정 개혁이라는 새로운 보람을 찾아 사세국장 직무에 임했다. 그러나 큰 기대 속에 취임한 사세국장 자리를 그는 몇 개월(1961년 1월부터 6월까지)밖에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일 스트레스 때문인지, (일부 사람들 해석처럼) 급하고 불같은 성격 때문인지, 1961년 봄 그는 혜화동 로터리에 있던 수도병원(훗날 고려대병원)에서 위궤양 수술을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