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까지 퍼펙트…"잘 던지고 무승부"삼성과장의 예언(?) 적중
볼 넷 하나만 내줬지만 10회 말 삼성이 점수 못 내 '비공인 불운'
기자가 좋은 점은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꼽는다.
2004년 10월25일. 나는 대구야구장에 있었다. 프로야구 삼성과 현대의 한국시리즈 4차전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저 한국시리즈 중 한 경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기자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갔다. 삼성 선발투수 배영수의 볼이 예사롭지 않았다. 현대 타자들의 방망이는 무기력했다. 7회까지 퍼펙트.
"한국시리즈에서 퍼펙트게임 나오는 거 아냐?"
"최소한 노히트노런은 되겠는데?"
여기저기서 대기록을 예견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 나왔다.
"노히트노런하고도 무승부 될 것 같아요."
기자실에서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삼성 홍보 과장이었다.
이런.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도 아무도 꺼내지 않은 말을 팀 관계자가 하다니. 삼성도 그때까지 단 3안타에 무득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배영수는 씩씩하게 던졌다. 8회 2사 후 박진만에게 볼넷을 내줘 퍼펙트가 깨졌으나 9회까지 무안타 행진은 계속됐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삼성 홍보과장의 재수 없는(?) 예언은 그대로 적중해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배영수는 10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무안타 기록을 이어갔다. 하지만 야속한 타선은 10회 말에도 점수를 내지 못해 배영수에게 한국시리즈 10회 노히트노런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안겨주지 못했다.
'노히트노런'은 무안타 무실점은 물론이고, 팀이 승리를 거둬야만 인정되는 기록이다. 따라서 배영수의 기록은 비공인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경기는 결국 12회까지 0-0 무승부로 끝났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하며 끊임없이 자책하던 홍보과장의 뒷모습이 지금까지 생각난다.
배영수는 '불행한 투수'였지만 나는 그 역사적인 불운 현장을 지켜본 행운아였다.
요즘에는 9회까지 완투하는 투수를 보기 힘들다. 완투는커녕 7회까지 던지는 선발투수도 드물다. 1980년대 15회까지 232개를 던졌던 선동열이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의 이야기는 '전설'이다. 그때는 투구 수 관리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배영수는 투구 수 관리까지 하면서 10회까지 116개의 공을 던졌으니 그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족 하나. 노히트노런(no hit no run)은 일본식 영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그냥 노히터(no hitter)로 쓴다. 데드볼(dead ball) 같은 일본식 영어에는 거부감이 드는데 노히트노런만큼은 인정해주고 싶다. 안타를 맞지 않고도 점수를 주는 경우가 있으니까 노히트노런이 본래 의미에 더 가깝다.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6년 중앙일보 입사. 사회부-경제부 거쳐 93년 3월부터 체육부 기자 시작.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주요 종목 취재를 했으며 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한일 월드컵,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을 현장 취재했다. 중앙일보 체육부장 시절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으며Jtbc 초대 문화스포츠부장을 거쳐 2013년 중앙북스 상무로 퇴직했다. 현재 1인 출판사 'LiSa' 대표이며 저서로 부부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