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9:45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1) 쓰루 부인의 전방위 '외조'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1) 쓰루 부인의 전방위 '외조'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2.14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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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정권 바뀔 때마다 쓰루 생존 비결은 ' 부인 덕 '
뇌물을 안받고 '경제능력 빵점'인 남편위해 살림 도맡아 ' 정풍 회오리 '넘겨
육영수 여사의 자녀입시 기도 사찰도 주선… 청담스님과의 인연 다리 놓아
쓰루에게 막말을 들은 부하 달래고 총각관료 중매서는 등 고민 해결사 역할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천하에 거칠 것이 없던 쓰루가 대통령 말고 유일하게 어려워했던 사람이 부인이었다. 부처 내 직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박통까지도 그가 말을 듣는 것은 부인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부인이 함부로 그에게 조언을 하거나 충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그가 부인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험한 세상을 같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면 그런 관계가 당연했다. 그는 나랏일 하느라 바빠서인지 집안일은 완전히 내팽개친 '경제 능력 제로, 빵점짜리 가장'이었다. 돈을 벌고,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이 집안 걱정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준 최대의 우군이 바로 김옥남 여사다.

젊은 시절 김학렬 부총리와 김옥림 여사(왼쪽)의 다정한 모습.
30대 중후반일까. 젊은 시절 김학렬 부총리와 김옥림 여사(왼쪽)의 모습.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무원 조직에 숙정(肅整) 등의 정풍운동이 몰아쳤다. 쓰루가 과거 막강한 사세국장과 예산국장을 지내면서 여러 차례의 정풍운동 속에서도 영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결벽증 때문이었다. 박봉의 공무원으로서 뇌물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탁월한 경제적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내조' 중에 가장 빈번하게 또 중요하게 발휘되었던 것은 그의 거친 언행 때문에 고생하는 기획원 식구 '관리'였다. 쓰루에게 사무실에서 거칠게 당하여 '공무원 생활은 이것으로 그만인 모양이다'라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부하 직원의 소원 수리 창구는 김 여사였다.

김 여사는 명실공히 '공인 김학렬의 출세 파트너'였다. 그녀는 성격상, 자라온 배경상, 점잖은 안방마님으로 만족할 '여성'이 아니었다. 웬만한 남성보다 더 성취 지향적이었는데, 그녀의 최고 성취 목표는 쓰루의 출세였다. 그것을 위해 아낙네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도왔다.

김학렬 부인은 육영수 여사의 사적인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적극 떠맡았다. 육 여사의 가장 빈번한 고민은 자식들 교육이었다. '아들 셋을 경기중・고등학교에 보낸 어미'인 점을 김 여사는 백분 활용했다. 심지어 당시에 사회적으로 좋지 않게 보던 가정교사에 관해 조언하기도 했다. (자녀 교육 조언은 육 여사뿐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제공해준 '재능 기부'였다) 사진 왼쪽에서 첫째가 김학렬의 부인 김옥림 여사.
김학렬 부인은 육영수 여사의 사적인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적극 떠맡았다. 육 여사의 가장 빈번한 고민은 자식들 교육이었다. '아들 셋을 경기중・고등학교에 보낸 어미'인 점을 김 여사는 백분 활용했다. 심지어 당시에 사회적으로 좋지 않게 보던 가정교사에 관해 조언하기도 했다. (자녀 교육 조언은 육 여사뿐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제공해준 '재능 기부'였다) 사진 왼쪽에서 첫째가 김학렬의 부인 김옥림 여사.

남편의 출세에 쓰루의 상관 또는 박통과의 친분이 필요하면, 서슴지 않고, 드러내놓고, 거의 본능적으로, 그 집안과의 사적 친분을 위해 나섰다.

그녀의 태생, 집안 배경 등으로 볼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여자는 너무 나대는 게 아니다'라는 당시 점잖은 양반 집안 기준으로서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육영수 여사의 사적인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적극 떠맡았다. 육 여사의 가장 빈번한 고민은 자식들 교육이었다. '아들 셋을 경기중・고등학교에 보낸 어미'인 점을 김 여사는 백분 활용했다. 심지어 당시에 사회적으로 좋지 않게 보던 가정교사에 관해 조언하기도 했다. (자녀 교육 조언은 육 여사뿐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제공해준 '재능 기부'였다!)

육영수 여사가 자녀 입학 때 절에 가서 합격 기원을 하고 싶은데, 대통령 부인인지라 출타는 물론이고 특정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였다. 이때 육 여사를 청담스님이 주지로 있던 도선사에 데리고 간 사람이 김 여사였다. 그녀 덕에 육 여사는 남의 눈을 피해 108배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청담스님이 조계종 종정이 된 후 청와대와 불교계 간의 소통이 순탄해졌다고 한다.

쓰루를 위한 그녀의 내조 반경은 꽤 넓었다. 쓰루가 부총리가 되면서 김 여사는 당연직으로 육 여사가 늘 참석하는 양지회의 총무 역할을 위시하여 김성곤, 구태회 같은 여당 내 주요 인사 부인들과의 교분 등 그녀는 쓰루에게 내조라기보다는 외조에 가까운 도움을 줬다.

그녀는 총각 직원에게 중매 서기부터 시작해, 남에게 떼인 돈 찾아주기, 불륜관계 정리해주기 등등 쓰루의 동료 또는 같은 부처 관료들의 다양한 개인사나 고민에 해결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망 후 40년이 지나서도 부하, 동료 직원이 좋은 생각으로 기리는 대상은 쓰루보다는 김 여사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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