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4:30 (금)
◇김수종의 취재여록⑯비글 해협의 문명근씨 가족
◇김수종의 취재여록⑯비글 해협의 문명근씨 가족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12.0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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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로 향수 달래
점심 먹은 뒤 언제나 한 두시간 '시에스타'(낮잠)
땅끝 마을, 공기 깨끗해 "감기 한번 안 걸렸어요"
한 시간쯤 산책을 했는데 문명근씨가 해변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 곁으로 오더니 감회가 새로운 듯 말문을 열었다.
한 시간쯤 산책을 했는데 문명근씨가 해변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 곁으로 오더니 감회가 새로운 듯 말문을 열었다. "이 비글 해협에 핀 민들레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게 아니겠습니까." 바위 위에 자리를 고쳐 앉은 그는 처음 우수아이아에 정착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사진은 비글해볍쪽을 가리키는 안내표지 옆에 있는 필자. 사진=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문명근씨가 상추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사진 찍기로 한 날이었다. 편집국장이 브라질로 전화까지 해서 신신 당부한 게 사진이었다. 빙하가 걸린 산, 아니면 비글 해협을 배경으로 찍은 문 씨의 개척자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필름 아끼지 말고 셔터를 막 누르세요." 귀에 맴맴 도는 얘기였다.

아침 늦게 문 씨의 아들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어젯밤 한 잔하며 돈독해졌는지 그는 오늘은 농장 사진을 찍고 오후에는 나를 데리고 빙하와 땅 끝 지점에 구경 간다고 말해주었다.

날씨는 괜찮았으나 막상 농장에 도착해보니 촬영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비닐하우스 온실 안에는 무성한 상추가 아니라 추위에 시달린 배추와 무 등 여러 종류 야채가 듬성듬성 있었다. 사진 찍기에 적합한 계절이 아니었다. 더구나 비닐하우스와 비글해협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는 배경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문 씨가 비닐하우스에 기대 선 모습과 야채를 뽑아내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나의 취재 사실을 확인시켜 주게 식구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태극기와 한국일보 사기를 들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

농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후 문 씨 가족들은 시에스타(낮잠) 시간이라며 나에게 아들 방을 안내하며 낮잠을 자라고 말했다. 라틴계 사람들은 점심 식사 후 시에스타 2~3시간 즐긴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방을 나왔다. 그 집 식구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바닷가로 걸었다. 해변에는 눈이 녹아 까만 모래와 자갈밭인데 아무도 걸은 흔적이 없었다. 바로 비글해협이다. 1832년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이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가 갈라파고스를 탐험하고 '종의 기원'을 펴내서 '비글해협'이란 이름이 붙었다. 바로 좁은 해협 건너편에는 칠레 령 나바리노 섬 봉우리가 빙하로 덮여 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남미의 끝자락 티에라델후에고 섬은 바로 남미대륙 끝자락이 마젤란 해협으로 잘려나간 섬으로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반반씩 나눠 소유한 땅이다. Tierra del Fuego는 스페인어로 '불의 땅'이란 뜻이다. 유럽인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원주민들이 석유로 횃불을 만들어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쩌다 기대하지 않았던 비글해협 모래톱 위에 서게 됐지만 남극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감회가 밀려왔다. 납작한 자갈로 물팔매 놀이를 하던 중 이상하게 생긴 길쭉한 돌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돌칼이었다. 애지중지 갖고 와서 문 씨한테 얘기했더니 비글해협에서는 인디언들이 쓰던 돌칼이 많이 발견된다고 말해주었다.

농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후 문명근씨 가족들은 시에스타(낮잠) 시간이라며 나에게 아들 방을 안내하며 낮잠을 자라고 말했다. 라틴계 사람들은 점심 식사 후 시에스타 2~3시간 즐긴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방을 나왔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바닷가로 걸었다. 해변에는 눈이 녹아 까만 모래와 자갈밭인데 아무도 걸은 흔적이 없었다. 바로 비글해협이다. 사진( 비글해협을 거닐고 있는 필자)=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농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후 문명근씨 가족들은 시에스타(낮잠) 시간이라며 나에게 아들 방을 안내하며 낮잠을 자라고 말했다. 라틴계 사람들은 점심 식사 후 시에스타 2~3시간 즐긴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방을 나왔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바닷가로 걸었다. 해변에는 눈이 녹아 까만 모래와 자갈밭인데 아무도 걸은 흔적이 없었다. 바로 비글해협이다. 사진( 비글해협을 거닐고 있는 필자)=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낮잠에서 깨어난 문 씨 아들의 안내로 우수아이아 근처 국립공원과 세상 끝 지점(Fin del Mundo)을 구경했다. 사실 눈에 완전히 덮인 섬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었다. 문 씨 아들이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돌 위에 서더니 '땅끝'이라고 말했다. "정말이냐?" 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다."고 대답했다.

그날 저녁도 문 씨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문 씨 아들과 내가 관광을 끝내고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컴컴했고 창에 불빛만 비쳤다.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입구로 들어가는데 구성진 유행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귀를 의심했다.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남인수가 부르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창문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흠칫하며 "여기서 이런 노래도 나오나요?"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자주 틀어놓고 듣는 노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내가 비글해협이 아니라 경상도 어디쯤에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저녁을 먹고 잠시 문 씨와 얘기를 나누다가 농장사진이 미흡해서 내일 한 번 더 찍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는 의외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야채 재배 농장은 아니지만 조금 떨어진 해변에 돼지 농장이 있는데 거기서 찍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해변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튿날 문 씨와 돼지 농장으로 갔다. 큼직한 돼지 수십 마리가 사람을 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문 씨가 돼지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고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눈 속에 피어난 녹색 상추밭이 아니라 돼지우리가 내가 쓰는 기사의 배경 사진으로 바뀌게 되었다. 임무 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 씨네 집에서 점심을 마친 후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시에스타 시간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비글해협을 비추며 물결이 하얗게 출렁였다. 내일이면 우수아이아를 떠나게 된다. 다시는 올 수 없는 비글해협이라 생각하면서 바닷가를 걸었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문명근씨 가족들은 감기에 걸려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티에라델후에고에서는 공기가 깨끗하기 때문에 감기 바이러스가 없다고 말했다.

한 시간쯤 산책을 했는데 문명근씨가 해변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 곁으로 오더니 감회가 새로운 듯 말문을 열었다.

"이 비글 해협에 핀 민들레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게 아니겠습니까." 바위 위에 자리를 고쳐 앉은 그는 처음 우수아이아에 정착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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