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8 22:40 (목)
◇김수종의 취재여록⑫남한도 북한도 거부한 '백영훈 포로'
◇김수종의 취재여록⑫남한도 북한도 거부한 '백영훈 포로'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11.24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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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때 21살 나이에 인민군으로 참전…개성서 포로로 잡혀 거제도이송
"북한으로 돌아가기 싫었느냐"란 질문엔 고개만 끄덕…중립국 '인도'선택
2년동안머물며 기독교 신자 돼…1956년 다른 포로 55명과 함께 브라질로
교회서 허드렛 일하며 돈 모아 빗자루 공장 설립…빈민가에 학교세워 봉사

리우데자네이루 행 비행기를 타기로 한 날 아침 홍성학 지사장이 갑자기 한글판 신문 통관과 관련하여 세관에 일이 생겼다며 동행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를 차로 공항까지 바래다주면서 나에게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하면 백영훈씨가 나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쉬웠지만 혼자 움직여야 했다. 그는 걱정이 되었는지 "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날치기가 극성을 부리는 도시다. 게다가 동양인을 꺼린다. 호텔 문을 나설 땐 절대로 물건을 몸에 지니지 말라."고 말했다. 익숙하지 않는 카메라 가방이 걱정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 브라질에는 프로펠러 여객기가 참 많았다. 버스 타듯이 짐 검사도 없이 비행기 트랩에 올랐고, 비행기가 고도를 낮게 잡아 편안히 날면서 브라질의 밀림 경치를 잘 보여주었다. 잠시 후면 만날 중립국 포로 백영훈씨를 떠올려 보았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거제도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는 본인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남한에 머물렀다. 그러나 84명만은 북한도 싫고 남한도 싫다며 행선지를 제3국으로 택했다. 반공교육 탓인가. 중립국 포로에 대한 의아함이 생겼다. 자유가 더 있는 남한을 택하든지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갈 일이지 왜 제3국을 택했을까. 중립국 인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백영훈(오른쪿)씨는 브라질에 온후 교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학교를 세웠다. 사진=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거제도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는 본인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남한에 머물렀다. 그러나 84명만은 북한도 싫고 남한도 싫다며 행선지를 제3국으로 택했다. 반공교육 탓인가. 중립국 포로에 대한 의아함이 생겼다. 자유가 더 있는 남한을 택하든지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갈 일이지 왜 제3국을 택했을까. 중립국 인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백영훈(오른쪽씨는 브라질에 온 후 교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학교를 세웠다. 사진=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거제도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는 본인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남한에 머물렀다. 그러나 84명만은 북한도 싫고 남한도 싫다며 행선지를 제3국으로 택했다.

반공교육 탓인가. 중립국 포로에 대한 의아함이 생겼다. 자유가 더 있는 남한을 택하든지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갈 일이지 왜 제3국을 택했을까.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했다. 초겨울인데도 공항터미널 유리창 넘어 보이는 오후 리우 거리 풍경은 남미 정취가 물씬했다. 야자수가 바람에 날리고 거리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여인들이 다니고 있었다. 까만 피부에 볼록 나온 히프는 아프리카 흑인 체형인데 얼굴 윤곽은 서양인 골격인 종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화가 천경자의 그림이 얼핏 떠올랐다.

터미널 로비에서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동양인이라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깡마른 체구의 동양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백 선생님..?"이라고 중얼거렸더니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백영훈씨였다. 세파에 시달린 흔적 뒤에 온화함이 느껴졌다.

그는 "리우가 처음이냐"고 물었다. 먼발치에 떨어져 서 있는 백인을 손짓해서 불렀다. "사위입니다." 영어를 약간 하는 그 백인은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백 씨는 나를 절벽 산 슈가로프 근처를 돌아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백사장으로 소문난 코파카바나 비치를 달렸다. 해변이 끝나는 곳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맥주와 스낵을 주문했다. 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오래 한국말을 쓰지 않은 탓인지 말이 서툴렀고 사용하는 어휘수가 제한적이었다. 한국사회와 절연된 채 30년을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백 선생님은 브라질 오신지 얼마나 됐습니까?"

"28년 됐을 거야요. 56년에 인도에서 넘어왔으니까." 북한 사투리 억양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고향이 평안도인가요?"

"아닙니다, 황해도 장연이오."

"가족은 몇인가요?" 그가 브라질 원주민과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딸이 셋이고 아들이 둘." 옆에 앉은 백인 사위를 가리키며 "큰 사위"라고 말했다.

"어디서 포로가 됐나요?"

"경기도 개성(6.25 당시 개성은 경기도에 속함) 부근이오."

"거기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로 온 겁니까. 그럼 서울을 거쳐 거제도로 갔겠네요?"

"밤에 기차에 실려 왔으니 남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왜 중립국을 택했나요?" 북한에 돌아가기 싫었나요?"

그는 만감이 교차했는지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하고 백씨의 학교를 보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다음날 아침 학교를 구경시켜주겠다고 대답했다.

카페에서 나온 후 백 씨 사위가 모는 폭스바겐이 시내 관광코스 몇 곤대를 들리고 정글 같은 산길을 한참 달렸다. 그리고 정상에 도달했다. 그 유명한 예수상이 있는 코르코바두 산 정상이었다. 리우데쟈네이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요트 항구, 무역선 부두, 슈가로프, 코파카바나비치를 내려다보며 '세계 3대 미항'이란 명성이 헛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를 가면 구경만 해야 할 텐데 취재대상을 옆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부산했다.

나는 백씨에게 코파카바나 근처 한가한 모텔 방을 잡아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또 한참 달려 바닷가 늪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어둠속에 바위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하얀 파도가 희끄무레하게 눈에 들어오는 조용한 곳이었다. 백씨는 다음날 아침 8시쯤 모텔로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날 백 씨를 만나 직접 취재한 백씨의 삶의 궤적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백영훈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스물한 살인 그는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경기도 개성 부근에서 포로가 됐고 열차에 실려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정전협정에 따라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반공포로는 석방됐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은 파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백 씨는 북한도 남한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제3국으로 가는 중립국 포로의 신분을 택했다. 그는 1954년 부산항에서 인도 선적 '타고로' 호를 타고 다른 중립국 포로 87명(4명은 중국인)과 함께 인도로 향했다.

백 씨는 인도에 2년 머문 후 1956년 다른 포로 55명과 함께 브라질로 향했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유노동자가 되거나 가게에서 일하며 살았다. 인도에 살 때 기독교 신자가 된 백 씨는 리우데자네이루 기독교 선교부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때 학교나 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던 일종의 소사와 같은 일이었다.

백씨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어렵게 교회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빗자루 공장을 만들어 돈을 벌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브라질 빈민가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생각하며 고아와 같은 불행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백 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KBS 등 국내방송과 신문의 현지 취재로 소개된 적이 있다. 선교회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데 그의 열성과 신앙심에 감동한 목사가 그에게 고아원 경영을 맡겼다. 80여명의 고아와 이들을 돌보는 40명의 보모에게 들어가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백 씨는 교회의 원조로 조그만 빗자루와 가구공장을 경영하고 양계장도 만들었다.

그는 1965년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저축한 돈으로 빗자루 제조공장을 설립해서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잘 됐다. 야자수 줄기를 원료로 만든 빗자루는 브라질 가정의 상비품이다. 그의 빗자루 공장 주변은 빈민가였다. 그는 가난한 동네 원주민들에게 전기와 수도를 무료로 공급해 주는 선행을 했다. 이런 일로 백씨가 브라질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내가 그를 만났던 1984년 브라질 교포들 사이에 돌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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