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23:45 (수)
◇김수종의 취재여록⑩잊지 못할 '南美의 두 한국인'
◇김수종의 취재여록⑩잊지 못할 '南美의 두 한국인'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11.1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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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밀림서 선교활동하는 '인민군 포로 출신' 목사
아르헨티나의 땅끝서 상추농장 개척한 의지의 한국인

기자는 현장의 기록자다. 살인현장, 전쟁터와 같은 긴장과 공포의 현장도 있고, 스포츠나, 공연과 같은 흥분의 현장도 있다. 또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어떤 개인의 정물화 같은 현장도 있다. 취재 대상에 따라 기자의 긴장과 흥분은 정도가 다르지만, 아무리 정물화 같은 현장일지라도 기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시간적 제약과 이야기를 독자에게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압박 속에 사는 기자들에게 긴장은 일종의 생리다. 기사를 글로 쓰는 기자도 그렇고,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사진 기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1983년 10월부터 46개월 동안 미국 LA한국일보 기자생활을 했다. 서울 본사를 위해 취재활동을 하는 소위 특파원이 아니라 교포를 위해 뉴스를 취재하는 교포 신문 기자였다. 당시는 미국 이민이 붐을 이루던 시기였고, LA는 '서울특별시 나성구'라 불릴 정도로 30만 명 내외의 교민이 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서울의 주요 일간지들이 현지에 지사를 설치하고 교포들을 상대로 신문을 찍어냈다.

필자인 김수종 이코노텔링 고문은 37년전 뜻밖의 취재기회를 얻었다. 그 때 만난 두 한국인의 인생역정은 그를 사로잡았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땅끝마을 우수아야의 빙산과 함께 서 있는 김수종 고문.
필자인 김수종 이코노텔링 고문은 37년전 뜻밖의 남아메리카 취재기회를 얻었다. 그 때 거기서 만난 두 한국인의 인생역정은 그를 사로잡았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땅끝마을 우수아이아의 빙산과 함께 서 있는 김수종 고문. 사진=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당시 한국일보는 LA에서 정말 잘 나가는 신문이었다. 서울 한국일보에서 저녁에 처음 인쇄되어 나오는 내일 자 조간신문 몇 부를 차에 싣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LA행 대한항공 승무원 편에 보내면, LA공항에서 출구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이를 받아들고 시내 회사로 달려갔다.

광고만 갈아 넣고 기사는 그대로 복사한 다음, LA본사 편집국 기자들이 만든 현지판과 함께 교민들에게 배달했다. 배달은 주로 우편으로 했다. 인터넷도 없었던 그 때 교포들은 본국 뉴스와 생활안내 광고를 보기 위해 신문이 나올 때쯤이면 신문사나 코리아타운 가판대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LA한국일보는 소수민족 신문으로 발행부수가 쑥쑥 늘어나고 광고가 폭주했다.

현지 교포나 유학생을 기자로 선발해서 쓰는데 한계를 느꼈던 신문사는 취재와 기사작성에 익숙한 본사 기자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한국일보 사회부에 근무하던 나와 동료기자가 LA한국일보로 파견된 것이다. 내가 LA에서 할 일은 미주 교민 사회에 필요한 뉴스를 취재해서 기사를 쓰고, 본사의 요청이나 관심이 있을 만한 얘기를 취재해 서울 본사로 송고하는 일이었다.

나와 식구들이 미국 생활 적응에 애를 먹던 1984년 이른 봄 LA한국일보 이철 편집국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1960년대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 일찍 미국으로 이민 간 베테랑 언론인이었다.

"오늘부터 아르헨티나를 공부하십시오. 창간 기념일에 낼 특집기사를 '김형'한테 맡기기로 해서 사장이 오케이 했소. 남미 대륙 끄트머리서 상추 농장을 개척한 '한국인'이 있으니 그의 개척정신을 취재하는 겁니다. 또 한 사람은 아마존 밀림 속에서 20년간 인디언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하는 '한국인 목사'가 있는데, 그 사람도 취재하면 좋겠소. 브라질 상파울루 지사에 연락해서 취재원 접촉을 의논하면 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LA 교포신문 기자로서 나는 남아메리카 취재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들이 알바로 돈을 벌어 페루의 마추픽추나 이과수 폭포로 여행을 떠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38년 전에는 공무원이나 종합상사 직원 또는 중동근로자가 아니면 여권을 받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남미는 외교관과 극소수의 종합상사 사원만이 가볼 수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야말로 오지였다.

당시 남미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브라질 축구와 삼바, 코파카바나 비치, 그리고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였던 포클랜드 전쟁 정도였다. 창간 기념일이 6월 9일이니 4월에 취재 가는 게 좋다는 편집국장의 지시에 맞춰 여행준비를 했다. 사실 미국 생활에 힘들어하는 나를 격려할 겸, 창간기념 특집을 거창하게 꾸며 보려는 편집국장의 의도가 있었던 일이다.

여행 준비는 만만찮았다. 우선 브라질 비자 받기가 힘들었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아르헨티나는 쉽게 비자를 발급해줬지만 오래 군사정부가 통치하던 브라질의 비자를 받는 일은 까다롭고 성가셨다. 당시 외교적 문제로 한국인에게 비자발급이 까다롭다는 소문이 돌았다. 브라질 영사관에 신청하고 한 달을 기다린 후에야 온 통지는 LA경찰국이 발행한 신원확인서를 첨부하라는 것이었다. 비자가 나온 것은 처음 취재계획 일정이 훨씬 지난 5월 초였다.

취재원 접촉에도 문제가 생겼다. 한국일보 상파울루 지사장 홍성학씨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한 결과 아르헨티나 최남단 교포 문명근씨로부터는 취재협조 약속을 받았지만 아마존 밀림의 선교사로부터는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그 선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선교사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부족전쟁이 일어나서 매우 살벌하니 취재가 불가능 합니다. 당신이 와도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 없습니다."

나도 실망했지만 아마존 밀림 속에서 원주민에게 포교하는 한국 선교사의 스토리를 창간 특집호에 실으려던 이철 국장의 실망감이 더 컸다. 지금도 그럴 테지만 당시 LA교민들의 삶은 주로 교회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아마존 선교사 스토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선교사 취지가 불발로 결론나자 편집국장은 더욱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이번 취재는 기사보다 사진이 중요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건 남미 대륙 끝에 사는 파블로 문(문명근)의 사진입니다. 필름을 아끼지 말고 여러 각도로 셔터를 많이 누르세요. 바다와 농장과 인물이 함께 나와야 합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내가 갖고 간 카메라는 사진기자들이 쓰는 니콘 카메라였다. 당시만 해도 신문 사진 촬영은 조리개와 셔터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기사를 쓰는 기자는 아예 카메라에 손을 안 댈 때였으니 은근이 걱정이 앞섰다. 마음이 안 놓였던지 편집국장은 수시로 나를 불러 사진을 강조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브라질 도착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북한군 출신이 브라질로 이주해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솔깃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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