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5:30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8)박정희 대통령의 총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8)박정희 대통령의 총애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1.23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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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박 대통령 의중 간파해 경제정책 주도권
기획원 초도순시 때 朴통"내용이 건전하고 충실하다" 공개적으로 극찬
정책 추진 과정서 대통령 진의를 의심하면 " 내 말이 곧 예수님 말 "잘라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라는 어느 장관의 말을 청와대 전화해 뒤집기도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고성 촌놈 쓰루가 대한민국의 부총리가 될 수 있었고, 부총리로서 남부럽지 않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박통의 외조와 부인의 내조 덕분이었다.

그가 1년 365일 온통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서의 소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밖으로는 박통의 신임을 먹고 살았고, 안으로는 부인의 벌이 내조에 의지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쓰루는 박통의 신임을 경제팀장으로서 지휘권 발휘에 백분 활용했다. 그를 보면, '부총리는 대통령의 신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경제팀을 꾸릴 정도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청와대에 수석으로 있으면서 경제 문제를 속속들이 파악했고 박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다. 그가 얼마나 평소에 박통의 신임 자랑을 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쓰루는 박통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경제장관회의 중에 행여나 자신의 정책 추진 방향과 관련해 박통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 발언이 있으면, 바로 "내 말이 예수님의 말이니 그대로 시행하시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수첩에는 경제팀 후보 리스트와 더불어 대통령이 관심을 두고 있거나 관심을 두어야 하는 정책과제 리스트도 늘 담겨 있었다.

샘솟듯 시원시원한 해결 방안을 내놓는 그를 박통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칭찬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쓰루가 부총리로서 처음 선보인 (1970년 초) 기획원 업무 보고에 박통은 "아주 건전하고 내용도 충실해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라고 극찬했다. 사진은 1970년 5월 26일 마지막으로 미국과 무상원조협정에 서명을 하는 휴스톤 AID처장을 지켜보는 쓰루. 그의 표정이 그 다지 밝아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대도 점차 저물고 있는 전조였다.

청와대 경제수석 때뿐 아니라 부총리 때도, 아니 특히 부총리 때 쓰루는 박통의 분신이었다. 경제에 관한 한, 그도 박통도, 그를 박통의 분신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박 대통령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박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어떻든 행정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 더러 자신의 의지를 고집했던 장 부총리와는 달랐다."(최우석 증언)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박통이 시키는 대로, 박통의 바람대로 일에 임하였고, 나중에는 주체적으로 박통의 생각을 자신의 것과 일체화해갔다. 그에 대한 박통의 무한 신임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생각을 박통의 생각으로 들어 올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의 괴팍하면서도 거칠고 튀는 언행은 그때의 사회 통념으로는 위로든 아래로든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더 주류의 생각과 언행 방식에 따를 것을 강요하는, 매우 단문화적인 시절이었다.

그 같은 기인이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모난 사람이 출세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때였기에 그의 남다른 관운은 많은 사람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당시의 리더는 덕장(德將)이어야 했다. 맹장(猛將)은 리더로서 제일 낮은 평가를 받을 때였다. 그런데도 (자발적이든, 강압적 분위기에 의해서든) 그와 같은 언행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박통의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총리가 된 이후 그의 상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언행은 부처 내에서는 부하 직원, 행정부 내에서는 여타 부처와 그 장관들, 밖으로는 국회와 언론 등 모든 이의 자자한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통은 그를 더할 수 없이 믿고 중용했다.

박통은 한 해를 초도순시로 시작했다. 초도순시는 엄중한 행사였다. 어찌 보면 그 부처와 장관의 한 해 흥망을 그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쓰루는 거기서 늘 좋은 점수를 땄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을 미리 파악해 소상히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해결 방안을 내놓아서였다. 대통령의 어젠다를 선점하는 것이다.

샘솟듯 시원시원한 해결 방안을 내놓는 그를 박통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칭찬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쓰루가 부총리로서 처음 선보인 (1970년 초) 기획원 업무 보고에 박통은 "아주 건전하고 내용도 충실해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라고 극찬했다. 남 있는 데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박통은 자신의 공개적인 칭찬이 어떤 파급 효과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은 전파를 타듯 그날로 전 부처에 알려졌다. 기획원 초도순시에 배석했던 여타 장관들이 그에게 한턱내야겠다고 저마다 조크를 했다고 한다.

부총리 직무 기간과 더불어 그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갔다.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무엇보다 그의 추진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추진력은 관료로서 소명 의식이 투철했고(좌고우면이 없는 그는 뼛속까지 관료였다!), 철저한 공사 분리로 스스로 약점이 없었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또 스스로 여느 관료보다 능력과 지력을 갖추었다고 믿고 있었고, 주변의 평가도 그런 그의 자신감을 부추겼다.

그런가 하면, 그가 왕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추진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박통의 무한한 신임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추진력이 박통의 신임을 두텁게 하고, 다시 그 박통의 신임이 그의 추진력을 높였던 것이다. 그의 추진력과 박통의 신임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었다.

"김 부총리가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2년여, 그리고 부총리로 2년 6개월간에 걸친 세월 동안 박통과 더할 나위 없이 밀착되어 있었고, 그것이 경제정책 수행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하겠다."(엄일영 증언)

절대 권력자 박통의 신임은, 쓰루가 자신의 행정 리더십 발휘에 자랑스럽게 또 자주 동원했던 자산이었다. 박통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박통이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이거나, 아니면 그가 때때로 다른 조직(특히 다른 부처)이나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그와 입장을 달리하거나 그처럼 박통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의 언행이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었다. 그는 그런 비난을 괘념치 않았다.

어떤 때는 다른 부처 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라는데도, 그것이 쓰루 자신이 이해하는 대통령의 뜻과 다를 경우에는 그걸 공개적으로 바로 잡기까지 했다. 어느 날 회의 중에 한 장관이 "이것은 대통령 지시 사항입니다"라고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쓰루가 "그래요? 잠깐 기다려보시오" 하고는, 회의하다 말고 부총리 집무실로 가서 청와대에 전화를 했다. 회의실로 다시 돌아온 쓰루 왈 "지금 전화해보니까 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장관의 체면이 만천하에 구겨진 것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박통 신임의 사실 여부, 그 신임의 정도를 확인할 배포를 가진 사람은 감히 아무도 없었다. 그에 대한 질시와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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