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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0) '화려한 음모'㊥"원유는 달러로만 사라"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0) '화려한 음모'㊥"원유는 달러로만 사라"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8.18 08: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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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기축통화 유지에 올인한 미국정부는 키신저 보내 '사우디와 빅딜'
OPEC회원국 모두와 '달러결제'협정… 달러수요 폭발하자 '强달러'유지
1970년대 말 오일 달러의 미국 유입 밀물… '월가의 환호' 이면엔 그늘이

지난 번 글 '오일쇼크(㊤)'에서는 오일쇼크에 대한 두 가지 '일반해석'을 다뤘다. 첫째, 이스라엘과 아랍을 대립 구도로 하는 '중동전쟁의 결과'라는 해석과 둘째, 닉슨쇼크와 세계통화체제의 붕괴에 의한 '중동 산유국들의 경제적 손실 보전'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첫 번째 해석을 '정치적 해석'이라 한다면 두 번째 해석은 '경제적 해석'이라 부를 만하다. 이 같은 '일반해석'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첫째는 이 두 개 해석이 별도로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렇다. 이 두 가지 일반해석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면 세 번째의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 일단 지난 번 글에서 제시한 두 가지 사건의 맥락을 약술해 보자. 다시 한 번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 체제 변동 과정】 1944년 1월 : 미국은 35달러에 금 1온스를 교환해 준다는 브레튼우즈 협상 체결/ 1971년 8월 : 미국은 금과 달러의 교환, 즉 금태환 약속을 일방 파기('닉슨쇼크')/1971년 12월 : 달러의 평가 절하와 제한된 변동환율제 인정하는 스미소니언 체제 출범 /1976년 1월 : 현재와 같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킹스턴 체제 출범

【중동전쟁 전개 과정(1~4차)】1948년 5월(제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독립을 부정하며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레바논 등이 이스라엘 침공/1956년 7월(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 소련의 지원 아래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함께 시나이 반도 점령/1967년 6월(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이스라엘이 전격 전면전을 일으켜 요르단의 서해안 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등을 점령 /1973년 10월(제4차 중동전쟁=욤키프르전쟁ㆍ라마단전쟁) : 이집트와 시리아가 지난 3차전쟁에서 잃어버린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 침공. '석유의 무기화'로 제1차오일쇼크 발생

이제 이 두 개 사건의 맥락을 합쳐 보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1970년 이후, 즉 제4차 중동전쟁만 보면 된다. 그럼 다음처럼 정리된다.

【1970년대 국제통화 체제 변동과 제4차 중동전쟁】1971년 8월 : 미국은 금과 달러의 교환, 즉 금태환 약속을 일방 파기('닉슨쇼크')/1971년 12월 : 달러의 평가 절하와 제한된 변동환율제 인정하는 스미소니언 체제 출범 /1973년 10월(제4차 중동전쟁=욤키프르전쟁ㆍ라마단전쟁) : 이집트와 시리아가 지난 3차

전쟁에서 잃어버린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 침공. '석유의 무기화'로 제1차오일쇼크 발생 /1976년 1월 :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킹스턴 체제 출범

이렇게 합쳐 놓고 보니 확실히 낯설다. 1970년대 초중반 국제통화 체제의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벌어진 제4차 중동전쟁. 이 같은 정리를 본 적이 있나? 없을 것이다. 통화체제는 통화체제의 맥락에서, 중동전쟁은 전쟁의 맥락에서 설명되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이질적인 맥락의 사건을 함께 묶어 놓는 일은 거의 없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조합을 만든 것일까?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국제통화체제의 변동과 제4차 중동전쟁이?

답은 '예스(yes)'다. 그냥 '관계가 있다' 정도가 아니다. 필자는 제4차 중동전쟁이 새로운 국제통화 체제의 구축에 확실한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중동전쟁이 역할을 했다? 아니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 '역할을 했다'는 표현보다는 '활용을 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미국에게. 왜? 달러를 기축통화로 계속 유지하기 위해.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제4차 중동전쟁 발발 뒤 일정을 좀 더 세분해 봐 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뒤 한 달 간 과정이다.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일정】1973년 10월 6일 발발/10월 16일 제1차 오일 쇼크 /10월 25일 UN 안전보장 이사회 UN군 파견 결정 /10월 28일 UN군 1진 수에즈운하에 도착 /11월 11일 이집트-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조인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살 국왕을 찾은 키신저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살 국왕을 찾은 키신저

이 일정에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서 미국의 국무장관이자 대통령 닉슨 다음의 파워 맨 헨리 키신저,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973년 11월 8일, 그는 엉뚱하게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과 회담을 나누고 있었다. 휴전 협정 3일 전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에 대한 원유 공급 중단을 재개해 달라는 것.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파이살 국광은 원유 수출 금지를 해소해 달라는 키신저의 요청을 거절했고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돌려줄 때까지 수출금지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키신저 역시 자서전에서 이때 상황을 좋지 않게 그린다. 키신저는 "이날 만찬에서 카이살 국왕은 '만찬 음식 모두가 중동산'이라며 '결국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상황이 그 정도에서 그쳤던 것은 아니다. 뭔가 미국-중동 간 뒤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시도도 있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한 가지 힌트가 있다. "키신저가 미국의 평화 유지 계획을 설명하며 파이살 국왕을 설득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유 금수조치 해제를 위한 당근으로 보일만 했다. 하지만 훗날 이날 키신저의 정책 설명은 매우 긴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추후 두 나라 간 비밀 회담과 비밀 협약의 실체가 드러났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시설을 보호와 군사 지원을 약속했고 미국은 그 반대급부를 얻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든 원유 수출은 달러로 결제한다는 것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원유 수출입 계약에서 결제통화를 달러에 국한시킨다!

1974.7.15일  정상회담을 가진 닉슨 대통령과 파이살 국왕
1974.7.15일 정상회담을 가진 닉슨 대통령과 파이살 국왕.이들의 만남이 향후 '페트로-달러 체제'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달러 폭락에 이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 상실 위기에 처했던 미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神)의 한 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달러 결제가 왜 중요한지 보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원유의 25%가 매장된 최대 생산국으로 OPEC의 맹주다. 그런데 이 나라 원유 수출을 모두 달러로 결제하기로 했단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수입하려는 나라들은 무조건 달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나라든 원유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늘 구입해야 한다. 당연히 달러도 늘 갖고 있어야 한다. 이로써 달러는 엄청난 새 수요처를 찾았다. 하지만 미국에게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비밀협약은 그저 첫 걸음일 뿐이었다. 이 같은 결제시스템은 중동의 다른 산유국들과도 체결해야 했다. 달러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야 달러를 더 찍어내도 기축통화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이를 목표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더욱 공을 들였다. 1974년 미국이 사우디와 경제협력위원회(The US-Saudi Arabian Joint Commission on Economic Cooperation)를 설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원유수출의 결제대금을 달러로 한정시켜 주면 미국으로부터 받아가는 게 많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미국의 각종 선진기술 이전은 물론 SOC 건설에 공무원 교육까지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게 중동과의 관계 개선은 대단히 절박한 문제였다. 세계평화니 중동평화니 하는 말은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달러'였다. 1971년 12월 새로운 국제금융체제인 스미소니언 체제 이후 미국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스미소니언 체제 아래 미국은 매우 어려운 입장이었다. 1971년 8월 닉슨의 일방적인 금태완 정지는 금본위 통화국이었던 미국을 한 순간에 단순 화폐통화국으로 전락시켰다. 미국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후 새로운 국제통화체제 구축과 함께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유럽의 주요 나라들과 일본의 생각이 미국과 달랐던 것이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달러는 시간이 가면서 폭락했고 세계적인 통화위기가 발발했고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지위조차 유지가 힘들다는 전망이 나왔다.

중동전쟁이 일어나면  유가는 폭등했다. 그 중동전과 미국의 달러 기축통화 유지는 어떤 관계였을까. 이 영화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그래픽=이코노텔링 그래픽팀.
중동전쟁이 일어나면 유가는 폭등했다. 그 중동전과 미국의 달러 기축통화 유지는 어떤 관계였을까. 이 영화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그래픽=이코노텔링 그래픽팀.

스미소니언 체제는 출범 직후에도 힘을 쓰지 못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체제는 '달러 과다 발행'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스미소니언 체제는 달러를 소폭 평가절하하고 일부 변동환율제를 인정하는 준(準) 금본위제였다. 달러가 남아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니 미국의 힘에 못 이겨 억지로 서명은 했다 해도 이 체제를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려던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구체제는 사라졌으나 새로운 체제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IMF 상무이사였던 요한 위트빈(Johan Witteveen)은 "국제통화시스템은 1930년대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게 절실했던 것은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이미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혜택을 누려왔다. 돈을 마음대로 찍어 쓰는 특권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이 꿀보다 달콤한 이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라'였을 것이다. 다시 금본위제를 하면 가능했다. 그러려면 다른 나라의 금을 가져와 금의 보유량을 늘리거나 지나치게 많이 찍어낸 달러를 수거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없었다.

막다른 길에라도 도착한 듯 보였던 미국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대안을 찾아낸다. 달러에 대한 수요를 늘리자! 그렇다면 달러를 많이 찍었어도 달러는 일정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고 기축통화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마침내 새로운 수요처를 찾아냈다. 바로 중동이었다.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 수출을 달러로만 결제한다면 미국은 기축통화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 최대 에너지원인 석유를 사기 위해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달러를 비축해 둬야 했다. 그보다 더 큰 수요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이 키신저 국무장관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특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국은 성심을 다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대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거절하기 어려워 보이는 많은 당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제한한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달러의 기축통화를 유지하려면 중동의 다른 주요국들도 이 협정에 동의해야 했다. 미국은 집요하게 이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리고 2년 뒤인 1975년, 미국의 목표는 마침내 실현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일한 협정을, OPEC 모든 나라와 체결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과 중동 간 세워진 새로운 통화질서 '페트로-달러(Petro-Dollar System) 체제'가 구축됐다. 이제 세계는 석유를 구입하기 위해 달러가 있어야 했다. 석유는 늘 필요하다. 그러니 달러도 늘 필요한 필수재가 됐다. 제4차 중동전쟁 직전 1000억 달러에 미치지 못했던 OPEC의 원유 수출 물량은 2년 사이 4000억 달러까지 뛰었다(2005년 달러 기준). 세계 시장에서의 달러의 수요 역시 4배 가까이 뛰었다.

미국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기축통화국이 되기 위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금본위제를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나라가 달러를 달라고 줄을 설 텐데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 페트로 달러 체제를 구축하고 몇 달이 지난 뒤 미국은 마침내, 허울뿐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금본위제를 폐기했다. 1976년 1월 세계는, 미국의 주도 아래, 변동환율제인 킹스턴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럼에도 달러는 여전히 기축통화였다. 돈을 더 많이 찍었지만 예전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윌리엄 엥달과 쑹훙빙의 책들. 이들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과 이로 인한 오일쇼크는 모두 미국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려는 전략의 결과로 본다.
윌리엄 엥달과 쑹훙빙의 책들. 이들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과 이로 인한 오일쇼크는 모두 미국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려는 전략의 결과로 본다.

이 정도 되면 새로운 의문이 생길 법하다. 제4차 중동전쟁도 미국의 작품 아니었냐 하는 의심이다. 그렇다면 세계경제에 30년대 대공황급 충격을 줬던 제1차 오일쇼크도 미국이 의도했던 것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음모론'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본격적인 베트남전 참전의 명분이 됐던 통킹만 사건도 자작극이 드러나고 말았다. 오일쇼크 역시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평이 있다. 유가가 오른 만큼 달러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당연히 이와 관련된 깊은 연구가 있다. 경제 전문가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펴냈고, 세계 주요 매체에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 윌리엄 엥달(William Engdahl)을 보자. 그는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이나 『화폐의 신』 등의 저서에서 달러와 관련된 키신저의 전략을 강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73년에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 엘리트들은 고유가를 통한 달러의 지위 회복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에 충격을 안겨준 책으로 평가받는 쑹훙빈의 베스트셀러 『화폐전쟁』 역시 이 같은 입장이다.

고유가를 통한 달러의 지위 회복은 과연 시도했을 만한 시나리오였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페트로 달러 체제'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고유가를 통한 달러의 지위 회복을 위해서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돼야 했다. 키신저가 명명한 것으로 알려진 '페트로 달러의 재활용(recycling of petro-dollar)'이 그것이다.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 회복을 노렸던 미국에 '페트로 달러 체제' 하나만으로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원유 수입을 위한 세계 각국의 달러 수요가 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원유 결제 뒤 중동으로 들어간 달러는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만일 이 돈이 다시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돌아다닌다면 달러는 약세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이 문제의 답 또한 분명했다. 중동으로 들어간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미국은, 당연히 이를 위해서도 주도면밀한 전략을 세웠다. 중동 원유 수출국에 달러가 국내에 들어가면 엄청난 인플레를 겪을 것이니 해외에 투자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다. 또 안전 자산으로 믿음직한 나라의 국채를 매입해 보유하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대상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엄청나게 벌어들인 달러를 투자하고 국채를 매입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거기에 중동 산유국들이 동조가 있다면 군사, 기술 측면에서 각종 혜택을 줬다. 앞서 말한 미국-사우디 간 경제협력위원회 설립도 실상 사우디로 간 달러를 다시 환수한다는 은밀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었던 1970년대 말 오일 달러의 미국 유입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게 마련이다. 잠재적이긴 했어도 이 같은 '오일 달러 재활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 투자시장에 엄청난 규모의 외국인 자금이 유입됐다 치자. 주가가 올라 좋기는 하겠지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1997년 외환위기 때와 같을 것이다. 금융시장은 물론 나라경제 전체가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 초 미국 금융시장에는 이 같은 불안이 팽배해 있었다.

영화 ‘화려한 음모’는 ‘오일 달러의 재활용’이 가져온 미국 금융가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
영화 '화려한 음모'는 '오일 달러의 재활용'이 가져온 미국 금융가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

영화 <화려한 음모>는 이때를 배경으로 한다. 엄청난 오일 달러의 귀환으로 월가는 한편으로는 환호성을 지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에 떤다. 만일 중동 산유국들이 한꺼번에 갑자기 돈을 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그럴 일은 없다고? 두 가지 가정 아래 가능하다. 하나는 중동 산유국들이 오일달러를 무기화 할 때이다. 이미 석유 자체를 무기로 삼아 두 차례나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달러를 무기 삼아 갑자기 달러를 뺄 수도 있다. 그럼 미국경제는 파탄 날 것이 분명했다. 또 하나 가능성이 있다. 달러의 폭락을 우려해 대규모 자금이 달러에서 금으로 이동하는 경우다. 이때 역시 달러의 폭락과 경제공황은 피할 수 없다.

영화 <화려한 음모>는 전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월가의 비밀을 다룬 영화다. 1980년대 새롭게 등장한 '금융영화'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기원'이라는 게 있다. 영화계 '금융영화' 장르도 그렇다. 이 장르의 기원으로 영화계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88년 작 <월 스트리트>를 꼽는다. 그러나 이 영화 <화려한 음모>는 1981년 작이다. '최초의 금융영화' 또는 '금융영화의 시원(始原)'이라는 타이틀이 걸맞다. 영화계 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영화 자체도 괜찮다. 감독도 배우도 명장(名匠)이라 할 만하다.

감독부터 보자. 파큘라 감독은 영화 제작 당시 이미 검증된 인물이다. 1969년 <푸키(The Sterile Cuckoo)>라는 코미디물로 데뷔한 그는 1976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정치 스릴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로 대박을 쳤다. 다음해 49회 작품상과 감독상 등 아카데미상 후보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4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비록 작품상과 감독상에서는 <록키>에 밀렸으나 각색, 음향 등에서는 최고임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을 대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영화 <소피의 선택>도 그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파큘라 감독이 <화려한 음모>를 개봉한 다음해인 1982년 개봉한 것으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기도하다.

여기에 출연진도 눈에 띤다. 여주인공 리 윈터스(Lee Winters) 역을 맡은 제인 폰다(Jane Fonda)는 1971년 파큘라 감독의 <클루트(Klute)>와 1978년 할 애쉬비(Hal Ashby) 감독의 <귀향(Coming Home)>으로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 이 영화 출연 당시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평가받고 있었다. <화려한 음모>에서의 연기도 당연히 손색이 없다. <화려한 음모> 개봉 다음해인 1982년에는 <황금연못(Golden Pond)>으로 또 다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등재돼 명배우의 면모를 드러냈다. 우리에게는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최우수작품상으로 호명해 다시 한 번 뇌리에 각인됐다.

금융 전문가 허벌 스미스(Hubbell Smith) 역을 맡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은 1970년대 미국의 포크계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다. '선데이 모닝 다운(Sunday Morning Down)', '와이 미 로드(Why me, Lord)', '포 더 굿 타임스(For The Good Times)' 등을 히트시키며 포크계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가수 출신인 만큼 연기력을 의심할 만하다. 하지만 기우(杞憂)다. 그는 1976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와 함께 출연한 영화 <스타탄생(A Star Is Born)>으로 34회 골든 글로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정도면 배우로서의 연기력도 출중하다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앨런 J. 파큘라, 제인 폰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이 정도면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인물이라 할 만하다. 영화 제작과 관련된 것이라면 '드림 팀'으로 불릴 수도 있지 않을까? '금융영화의 시조'로 불리는 <월스트리트>의 올리버 스톤-마이클 더글러스-찰리 쉰의 연출ㆍ출연진에 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화려한 음모>는 스토리 라인도 별 문제 없어 보인다.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 지수에서 두 영화 모두 78%라는 것 역시 이런 측면에서 볼 수 있자 않을까? 그러니 영화 <화려한 음모>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월 스트리트 영화의 원조'라는 타이틀은 <월 스트리트>보다 <화려한 음모>에 줘야 할 왕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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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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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 yeo 2020-09-28 18:27:33
훌륭한 글 잘보고 갑니다 블로그에 공유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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