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2:20 (금)
◇기업인 대권도전사㊤정주영,문국현,안철수 용꿈
◇기업인 대권도전사㊤정주영,문국현,안철수 용꿈
  • 성태원이코노텔링기자
  • iexlover@hanmail.net
  • 승인 2019.03.06 2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지여론은 높았지만 ‘조변 석개의 정치문화’에 좌초
정주영"1200만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했나" 한탄
보석 허가 받은 이명박은 '퇴임 후 구속 불명예' 나락

정주영 등 기업인들은 비효율적인 정치문화에 염증을 느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를 맞춰야 하고 정치권의 으름장에 떨어야 한다. 정치자금을 댔다가 탈이 나면 온통 바가지를 뒤집어 쓰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문화도 바꾸고 자신의 경영 노하우를 정치에 접목하면 나라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경제대통령’과 ‘대한민국 재창조’를 외쳤지만 이명박을 제외하곤 모두 고배를 마셨다. 그 이명박 대통령도 3월6일 조건부 보석허가를 받아 근 1년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실형이 확정되면 그는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업인의 대권도전사’를 두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주>

정주영,박테준,이명박,문국현,안철수  등 기업인들은 한국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대권에 도전했지만 이명박을 제외하곤 모두 쓴잔을 마셨다.  경제대통령과 국가대개조론을 내걸었지만 지지여론에 비해 언제나 득표율을 낮았다. 현실정치의 벽은 그만큰 강고했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은 정치현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정치개혁의 단초 역할을 한점도 없지 않다.
정주영,박태준,이명박,문국현,안철수 등 기업인들은 한국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대권에 도전했지만 이명박을 제외하곤 모두 쓴잔을 마셨다. 경제대통령과 국가대개조론을 내걸었지만 지지여론에 비해 언제나 득표율은 낮았다. 현실정치의 벽은 그만큼 강고했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은 정치현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정치개혁의 단초 역할을 한점도 없지 않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이건희(77) 삼성그룹 회장이 24년 전(53세)인 1995년 4월 13일 했던 소위 ‘북경 발언’의 요지다. 국내 언론사 베이징 주재 특파원들과 가진 오찬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이 발언으로 삼성은 김영삼 정부로부터 큰 고초를 겪었다.

삼성 측이 “삼성뿐만 아니라 국민·정부·기업이 다 함께 변해야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세기말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고 정권에 소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제왕적 대통령제 하의 정치권력이 기업인의 정계 진출이나 정치적 입장 표명을 얼마나 달갑지 않게 여겼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됐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70년 한국 기업사에서 기업인이 정치에 입문해 끝까지 성공한 케이스는 별로 없다. 현대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 정도가 정치에서도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혔다. 하지만 그마저도 문 정부 들어 수감 생활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업 경영을 통해 자타가 공인할 정도의 큰 성공을 이룬 기업인이 여론을 등에 업고 국가 경영도 해보겠다며 정계에 입문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순 없다. 문제는 기업 경영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인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민심을 얻어 내고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사생결단의 대결을 밥 먹듯 하는 국내 정치 바닥을 평정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대권을 꿈꾸며 실제로 정계에 투신한 기업인은 현대의 고(故)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 포스코의 고 박태준 회장,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안철수 의장 등 5명 정도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뜻은 있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기업인들이 대권 도전에 나서기 시작한 시기는 90년대 이후부터다. 한국 기업들이 대형화·글로벌화·전문화 하면서 기업인 중에서도 대권 도전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으로 대권 도전에 나섰던 기업인은 역시 현대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창업 1세대 기업인으로 꼽힌 인물이었다.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한발 물러나 있던 그는 슬슬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불과 한 달 후인 3월 치러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어 냈다. 본인도 전국구 의원이 됐고 여세를 몰아 대권 도전에까지 나섰다.

같은 해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김영삼(당선), 김대중(2위) 후보에 밀려 고배(3위)를 마셨다.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한다는 소리까지 듣는 가운데 ‘경제대통령·통일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정권의 견제가 심했고, 다른 재벌 기업들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반값 아파트, 2층 고속도로 등 기발한 공약으로 새 바람을 일으켰으나 금권정치의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도 받았다. 개표 직후 그는 “당원 1200만에 득표수 400만(실제로는 16.3%인 388만 표)이라니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라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선거 직후 정계를 은퇴했으나 현대그룹은 문민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현대그룹 출신으로 샐러리맨의 신화를 낳은 인물로 유명했던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도 1992년 기업에서 물러난 후 정계로 진출했다. 오너였던 정주영 회장과는 정치 노선을 달리했다. 14,15대 국회의원과 32대(민선 3기) 서울시장을 거쳐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당선(17대)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 바람을 타고 500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눌렀다. 경제 난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바람이 샐러리맨의 신화를 낳았던 그의 득표율을 더욱 높여 준 결과였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18대) 탄핵 후 들어선 문재인(19대) 정부 들어 옥고(獄苦)를 치르고 있다. 3월6일 보석허가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