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번뜩이는 생각 나면 메모장에 적어 놓았다가 출근하자마자 결행 습관
쓰루는 지주의 아들도 아니고 부호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도쿄제국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박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서 깊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집안, 재력, 학력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배경이 없는 그에게 믿을 것이라고는 머리 하나뿐이었다.
부총리 겸 기획원 장관으로서 그는 최고여야 했다. 그는 다른 부처 여느 장관보다, 기획원 그 누구보다 '먼저, 정확히,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했다. 그 최고에 한 치라도 빈틈이 있으면 그걸 채워놓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최고이기 위한 제1의 조건은 남보다 많이 아는 것이었다.
일본의 명문 대학에 낙방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대한민국 정부 제1호 관료로서의 부담 때문인지, 그는 자기가 책임진 일에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했다.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셋이 모두 경기중・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아들을 통해 그의 '머리'가 증명되었다고 느꼈음이리라.
머리가 비상하다는 그였지만, 남의 머리를 빌리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사적으로 서너 명의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전경련의 김입삼, 고려대 경영대학의 조익순 교수, 국민대 경제과 이기준 교수(경과심 위원 겸임), 서강대 경제과 김만제 교수 등이 그들이다. 모두 (좋은 점, 나쁜 점 포함) 그를 잘 알고, (나라경제를 같이 걱정하는) 대의를 앞세우는 품성을 공유하며, 그에게 직언을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최고로서 쓰루는 남보다 정확히 알아야 했다. 어느 날 그가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할 때였다. 정소영 경제수석이 그가 발표한 내용 중에 숫자가 틀린 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바로 "닥터 정, 내가 누구입니까, 김학렬입니다"라고 일축했다. 후에 그 통계는 쓰루가 얘기한 게 맞는 것으로 판명 났다.
그는 머리 좋은 사람답게 계수 파악과 암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아니, 그만큼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얘기일지 모른다. 그는 메모광이었다. 밤에 번뜩이는 생각을 머리맡에 둔 메모장에 적어놓았다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그 메모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게 습관이었다. 그를 아는 외국인들은'휴먼컴퓨터'라고 불렀다.
예산처럼 숫자가 많이 들어가는 경우에 그의 장점이 부각되곤 했다.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예산안을 다룰 때 조목조목 관련 숫자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다 보면, 숫자에 약한 일반 사람들은 제풀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암기 재능은 2년 반 동안 근무한 청와대 수석 시절에 길러진 것이었다. 즉, 박통이 지방 등 외부로 움직일 때면 '지금이 지역에 가시는 대통령이 무엇을 궁금해할까'를 미리 짐작하여 관련 통계와 정책 자료를 철저히 준비하곤 했던 것이다.
머리뿐 아니라 말도 신속 정확 그 자체였다. 그는 알맹이도 없는 느릿느릿한 장광설이나 전문가입네 장관입네 하는 거들먹거림을 참지 못했다. 남 재무가 가끔 이 때문에 쓰루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른 장관들이 그와의 회의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