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 19:40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2)朴통 면전서 난상토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2)朴통 면전서 난상토론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0.12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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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과학심의회의 '민간주도 연구결과' 보고서 내용 놓고 정책토론회
공정 거래법 제정도 거론… 박통"민영화 급진적 전환은 안돼" 선그어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1970년 12월 정일권 총리 내각이 물러나면서 백두진 총리 체제가 들어섰다. 그는 '민간 주도 경제'가 지론이었다.

71년도 첫 경제과학심의회의(이하 '경과심')에서였다. 경과심 위원 몇 사람이 민간 주도 경제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날의 토론은, 정부 대 민간의 역할에 대한 박통과 쓰루의 생각이 어땠는지, 박 정권이라는 한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대통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얼마나 격렬하고 솔직하게 정책 토론을 벌였는지, 서슬이 퍼런 권위주의적 정권 내부에서도 얼마나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지 등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어서 가급적 가감 없이 전한다.

그날 민간 주도에 관해 보고를 한 것은 송인상 경과심 위원이었다. 그는 쓰루가 재무부 이재국에서 장관의 민원을 못 해주겠다고 고집 피우다 예산국으로 밀려났을 때의 바로 그 장관이었다. 은행 민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쓰루가 바로 포문을 열었다.

(쓰루) 여러 가지 정책적인 건의가 있다. 현재 정부가 발표한 시책과 차이가 무엇인가? (송인상) 차이는 없다. 다만 그 우선순위를 정해서 나가는 것이 좋겠다.

1971년1월4일 경제과학심의회에 초두순시를 간 박 통이 (쓰루가 재무부과장 때 그 장관이었던) 송인상 위원으로부터 ‘민간주도경제로의 전환’과 관련한 보고를 받았다. 거기서 민간주도 경과심위원들과 쓰루간에 계급장을 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얼마후 민간주도경제를 주장해 왔던 백두진 총리가 김종필 총리로 바뀌면서 민간주도경제론은 한동안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1971년1월4일 경제과학심의회에 초두순시를 간 박 통이 (쓰루가 재무부과장 때 그 장관이었던) 송인상 위원으로부터 '민간주도경제로의 전환'과 관련한 보고를 받았다. 거기서 민간주도 경과심위원들과 쓰루간에 계급장을 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얼마후 민간주도경제를 주장해 왔던 백두진 총리가 김종필 총리로 바뀌면서 민간주도경제론은 한동안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후 쓰는 송 위원의 정책 제안을 하나씩 들어 캐묻기 시작했다. 첫 대상은 '정부기업 및 정부관리기업은 공익 및 사회 정책상 불가결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계적으로 공기업화 또는 민영화'하자는 대목이었다.

(쓰루) 정부는 며칠 전에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는 시설들을 불하했다. 장항제련소와 염업공사도 폐기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한 상태다. (경과심이 보고한 내용은) 정부가 이미 실행하고 있

는 정책과 차이점이 없다.

다음 타깃은 '외자 도입에 있어서 민간 신용 베이스에 의한 도입을 점차 확대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쓰루)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송인상) 어느 정도 민간기업이 자체 능력으로 차관 도입을 해 올 수 있으면 그런 방향으로 유도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다).

(쓰루) 민간기업의 차관을 민간인 신용으로만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 과연 얼마나 가능하며, 1972년에 가서는 얼마나 가능할까 의문이다.

다음 주제는 공정거래법이었다. 경과심 보고는 '공정거래법(반독과점 및 유통질서의 합리화)을 제정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마침 쓰루가 공정거래법 제정이 국회에서 지연되고 있는 것에 짜증을 넘어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쓰루)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해온 공정거래법 제정과 무엇이 다른가.

(송인상) 공정거래법 제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통질서에 관한 것도 넣자는 것이다.

(쓰루) 공정거래법안이 국회에 나간 지가 2년이 되었다.

그때까지 회의 주재만 하고 토론에 끼어들지 않던 박통이 드디어 회의를 마무리할 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가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장기 집권계획에 대해 '민주화에 역행한다', '독재 획책이다'라는 여론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 당시의 정치 상황과 민간 주도 경제 주장을 상당 부분 동일 선상에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대통령) 작금에 극단적 주장이 많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철학은 공자님이 말씀하신 중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도 민주적인 방향으로 유도해가야 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날 쓰루나 박통이 경과심 위원들, 아니 국민을 상대로 하고자 했던 말은 한마디로 '민간 주도 경제는 정부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국영기업체, 모든 국유은행을 다 민영화하는 식의 급진적 전환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그 후 경과심은 다시는 대통령의 연두 초도순시(대통령이 연초에 각 행정기관을 돌며 그해 업무계획 등을 보고받는 것)라는 연중 최대 행사를 하지 못했다. 그날의 회의는 대통령이 경과심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중요한 현안을 자신이 주재하는 경과심에서 반드시 토론을 거치게 했던 박통의 관행도 유야무야되었다. 경과심의 입지도 약해져갔다.

1971년 6월 취임 6개월 만에 백 총리가 물러났다. 새로 들어선 김종필 내각에서도 부총리는 여전히 쓰루였다. 그로부터 22년 후, 1993년 9월에 사망한 백두진은 국립현충원 국가 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쓰루 바로 옆자리다. 묫자리는 쓰루가 선배(1972년 3월 사망)다. 아마 두 사람은 저승에서 지금도 기회만 되면 당시 '민간 주도 경제' 논쟁을 벌이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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