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3 06:40 (목)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사(10) '화려한 음모'㊤ 오일쇼크와 중동전쟁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사(10) '화려한 음모'㊤ 오일쇼크와 중동전쟁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7.20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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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국가들이 기름 팔아 쌓아 둔 달러, 닉슨대통령의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폭락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 (OPEC), 전격적으로 원유가격 올리고 생산 줄이며 '보복'
중동전 이면에는 이스라엘 지원하며 '달러패권'유지 하려는 美와 아랍간 갈등 내재

미국이 무제한 양적 완화를 한단다. 한도 끝도 없이 달러를 푼다는 의미다. 팬데믹 이후 이미 많이 풀렸다. 돈을 풀면 돈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삼척동자도 안다. '달러 폭락설'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 일로 달러가 갖는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진짜 그럴까? 반론도 만만치 않다.달러를 많이 찍어도 달러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역사'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말은 맞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계속 달러를 찍어냈건만 달러는 여전히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경제위기 때에는 안전자산을 찾는 경향이 있어 어쩌면 달러가 오를 수도 있다고까지 한다.

달러는 오를까, 내릴까? '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부터 3회에 걸쳐 다루려는 이번 글에서 그 '시사점'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번 주제는 1970년대 발발한 '오일쇼크(Oil Shock)'다. 때로는 '석유위기(Oil Crisis)'나 '석유파동' '유류파동' 등의 이름을 쓰기도 한다.

이름은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무제한 양적 완화가 펼쳐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 '오일쇼크'로부터 달러의 등락(騰落)에 대한 예측의 시사점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달러가 그 수요처를 찾으면 많이 찍었어도 '등(騰)' 또는 '현상유지'요, 그 수요처를 찾지 못한다면 '낙(落)' 또는 '폭락(暴落)'이다. 우리는 1970년대 닉슨쇼크와 오일쇼크를 겪는 과정에서 이와 관련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1973년 10월 16~17일 양일 간 쿠웨이트에서 개최된 OPEC회의.
1973년 10월 16~17일 양일 간 쿠웨이트에서 개최된 OPEC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제 그 보따리를 풀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0년대 오일 쇼크를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 국가들이 치룬 전쟁, 즉 중동전쟁과 연관시킨다.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을 든 미국과 서구 열강에 대한 보복 과정에서 오일쇼크가 터졌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이 있다. 이때의 오일쇼크는 상당 부분 '닉슨쇼크'와 연관돼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5달러 당 1온스의 금을 언제든 바꿔주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 '닉슨쇼크'다. 오늘의 주제 '오일쇼크'를 다루기 전에 1971년의 '닉슨쇼크'를 전후한 국제통화 시스템을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금값 추이.
당시 금값 추이.

< 1944년 1월 : 미국은 35달러에 금 1온스를 교환해 준다는 브레튼우즈 협상 체결-1971년 8월 : 미국은 금과 달러의 교환, 즉 금태환 약속을 일방 파기('닉슨쇼크')- 1971년 12월 : 달러의 평가 절하와 제한된 변동환율제 인정하는 스미소니언 체제 출범-1976년 1월 : 오늘날과 같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킹스턴 체제 출범>

자, 이제 이 같은 국제 통화 시스템 변화의 시점과 내용을 염두에 두고 얘기를 진행시켜 보자. 이를 통해 '오일쇼크'에 대한 새로운 시각 또는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중동전쟁'이 아닌 '국제통화체제'의 관점에서 '오일쇼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당시 유가변동 추이.
당시 유가변동 추이.

사건의 발단은 1973년 10월 16일이었다. 이날 쿠웨이트에서 터진 뉴스 한 발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페르시아만의 6개 나라로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날 회의를 통해 원유가격을 종전의 배럴 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하겠다고 일방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유가 인상 발표 뒤에도 회의는 밤새 계속됐고 8시간 뒤인 다음날에는 또 다른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으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달 원유생산량을 5%씩 감산하겠다는 것이었다. 서구 언론은 이른바 '석유의 무기화'가 본격 채택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이것이 이른바 '1차 오일쇼크'의 시작이었다. '쇼크'는 컸다. 이후 한 달 만에 국제유가가 약 4배나 뛰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충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1차'란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이유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2차'도 있다는 의미다. 대략 5년이 지난 뒤 터진 이 '2차 오일쇼크'도 '1차' 못지않았다.

시작은 1978년이었다. 이해 혁명을 통해 이란의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는 일방적으로 석유수출 금지를 선언, 배럴 당 13달러 선이었던 유가를 20달러까지 올려놓았다. 이후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 및 유가인상 등으로 중동은 다시 한 번 세계경제에 충격을 주며 자신의 강력한 존재감을 알렸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관련해서는, 1차든 2차든, 일반 상식이 있다.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국가들과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간 갈등에서 빚어졌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제1차 오일쇼크가 이스라엘과 중동 이슬람 나라들 간 치러진 네 번째 전쟁의 결과로 알고 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니 첫 번째 오일쇼크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시 중동에서 치러진 네 개의 전쟁이다. 1~3차에 이르는 세 개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 : 1948년 5월의 이스라엘 독립을 부정하며 1949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이 이스라엘 침공-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 1956년 7월 소련의 지원 아래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함께 시나이 반도 점령-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전격 전면전을 일으켜 요르단의 서해안 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등을 점령>

1973년 10월 6일 터진 제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우위를 차지한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너고 있다.
1973년 10월 6일 터진 제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우위를 차지한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너고 있다.

제3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의 선방에서 시작됐다면 제4차 중동전쟁은 반대다. 사실 이집트와 시리아로서는 6일 전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전쟁에서의 패배도 치욕적이었지만 자국 영토 일부를 탈취 당했다는 사실은 '치욕' 이상의 실질적인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당연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리고

6년 뒤 기회를 잡았다. 1973년 10월 6일 유대교 및 이슬람교 모두에서 금식 기간 중 중동의 맹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것이다. 양측 모두의 금식기간 중이어서 이스라엘로서는 무방비 상태에서 뼈아픈 일격을 받은 셈이었다.

'선공(先攻)'의 효과는 컸다. 이스라엘의 지상군은 이집트 군의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초토화됐으며 이로써 이집트 군은 순식간에 수에즈 운하를 건너 수에즈 동안(東岸)을 점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집트는 적지 않은 지대공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집트 국민은 이집트의 승리에 열광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거리로 뛰어나와 기뻐하며 6년 전 패배의 치욕을 씻어내려 했다. 이에 힘입은 이집트 군은 더욱 열정적으로 진군, 수에즈 운하 동편 10km까지 파고들어가는 전과(戰果)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한 방 먼저 맞기는 했어도 이스라엘은 이미 아랍 국가들과의 세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저력 있는 나라였다. 전열을 가다듬자 점차 수세(守勢)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미국이었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에 우호적이다. 이스라엘의 요청이 있자 미국은 22억 달러에 이르는 최신식 무기를 제공했고 자국의 인공위성을 통해 이집트ㆍ시리아 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알려줬다. 중동의 아랍권 여러 나라가 미국에 격분했음은 물론이다. 개전 열흘 만에 OPEC 회의가 열리고 유가 인상 및 감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1차 오일쇼크는 전쟁이 다가 아니었다. 전쟁이 아니었다 해도 이미 아랍은 미국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이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71년 8월 미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일방적으로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세계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 어느 나라도 중동 산유국들의 피해 규모를 넘지는 못했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를 판 돈 대부분을 달러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다니! 2년 사이 금값은 35달러에서 100달러 이상으로 뛰었고 그만큼 달러가치는 하락했다.

중동 산유국들의 손실도 엄청났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닉슨쇼크에 대한 중동 산유국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닉슨쇼크 한 달 뒤인 1971년 9월 OPEC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긴급 회동, 회원국들에게 달러화의 가치 하락에 대한 손실 보전을 위해 석유회사들과의 가격 인상을 협상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이 지시가 즉각 효력을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닉슨쇼크 이후 미국은 세계금융시장 안정에 진력했고 여전히 기축통화국으로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OPEC의 복수는 이뤄졌다. 2년 뒤인 1973년 네 번째 중동전쟁을 계기로 중둥 산유국들은 미국과 서구열강에 복수의 칼을 빼 들었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기간 중 터져 나온 OPEC의 유가 인상 및 감산 결정은 서구 열강에 타격을 줬다. 세계경제는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성장이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물가가 올랐으며 기업 도산과 실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랍이 세계경제에 더 큰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이 같은 유가 인상과 감산을 한 번 더 감행했다는 점이다. 1978년 이란혁명과 그에 따른 중동정세의 변화로 터진 제2차 오일쇼크가 그것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던 세계경제는 이로써 다시 한 번 그로기 상태로 빠진다.

영화 '화려한 음모'의 세 주인공. 감독 앨런 J. 파큘라
영화 '화려한 음모'의 세 주인공. 감독 앨런 J. 파큘라

하지만 중동의 산유국들은 잔치를 벌일 만 했다. 단순히 자신들의 정책으로 서방 세계가 혼돈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가 아니었다. 중동 산유국들은 이 같은 정책 효과 외에 또 하나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유가로 세계의 돈을 쓸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74년부터 1977년 사이 세계에 유통되던 자금의 절반이 오일달러였다는 기록도 있다. 1970년대는 바야흐로 중동의 시대였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와 석유를 팔아 갖고 있던 돈으로 중동은 세계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세계 헤게모니를 갖고 있던 미국이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려한 음모>라는 제목이 달린 앨런 J 파큘라(Alan J. Pakula) 감독의 1981년 작 <롤오버(Rollover)>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귀하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다.

일단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기록도 있고 비디오도 출시돼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어디서고 한글 자막이 달린 영화는 구할 수 없다. 네이버나 다음은 물론 영화 전문 사이트에서 조차 대여나 판매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하다. 하지만 한글 자막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영화는 반대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그것도 무료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Rollover 1981'을 치면 러닝 타임 1시간 50분짜리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

남녀 주연을 맡은 전설적인 여배우 제인 폰다 및 1970년대 미국 포크계의 리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남녀 주연을 맡은 전설적인 여배우 제인 폰다 및 1970년대 미국 포크계의 리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귀하다'는 두 번째 의미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경제위기에 관한 영화는 꽤 있다. 우리는 이미 10편 가까운 경제위기 영화를 다뤘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것까지 치면 경제위기 관련 영화는 이 글에서 다룬 영화의 2~3배는 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오일쇼크에 대한 영화는 없다. <화려한 음모>가 필자가 찾은 유일한 영화다. 피터 오툴이 주연한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2년 작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시리아 내전을 다룬 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와츠 감독의 최근 다큐 작 <사마에게>에 이르기까지 중동의 전쟁 관련 영화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디에도 오일쇼크 관련 영화는 없다. 그래서 <화려한 음모>는 귀한 영화다.

이 영화가 귀한 세 번째 이유는 장르와 관련된 것이다. <화려한 음모>는 미국 금융가에 대한 영화다. 1970년대 월 스트리트를 장악한 오일달러 및 그와 관련된 음모와 위협을 담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금융영화, 또는 월스트리트 관련 영화의 원조는 통상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의 1987년 작 <월스트리트>를 꼽는다. 하지만 <화려한 음모>는 이보다 6년이나 앞서 나왔다. 가히 장르의 '원조' 타이틀을 넘겨받을 만하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 해도 작품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다. <월 스트리트>의 IMDb 평점은 7.4점인 반면 <화려한 음모>는 5.4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같은 평가는 재평가돼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화려한 음모>는 스토리나 출연진 등에서 결코 <월스트리트>에 못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 귀한 영화를 바탕으로 1970년대 오일쇼크를 알아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 오일쇼크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다. 중동전쟁, 그리고 국제통화체제의 관점이 그것이다. 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적의 편을 드는 나라, 그리고 국제통화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갑작스러운 금태환 정지를 통해 막대한 피해를 준 나라 미국에 대한 복수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관점에 가려진 또 하나의 관점이 숨겨져 있다. 바로 달러를 통한 미국의 패권 유지 관점이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 경제의 숨통이 끊어지려는 상황에서 미국은 어떻게 달러를 통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 금융가의 천재성과 무한 양적 완화를 실현하는 현 시점에서 달러의 향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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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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