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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벽을 넘어 '선진 강국'을 꿈꿨던 박세일의 삶
이념의 벽을 넘어 '선진 강국'을 꿈꿨던 박세일의 삶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02.13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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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박근혜,노무현의 러브콜 받은 학자이자 정치인… 진보 운동권 출신에서 '산업화와 경제성장 절감'
2018년 9월 한반도선진화재단 창립 12주년 기념행사때 세운 박세일 전 이사장의 부조상. 박세일은 좌우의 벽을 넘은 중도개혁의 기치를 내건 정치실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꿈꾼 한반도의 선진 강국의 꿈은 후학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영글 것이다.
2018년 9월 한반도선진화재단 창립 12주년 기념행사때 세운 박세일 전 이사장의 부조상. 박세일은 좌우의 벽을 넘은 중도개혁의 기치를 내건 정치실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꿈꾼 한반도의 선진 강국의 꿈은 후학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영글 것이다. (한반도선진화재단 홍보영상 )

“2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지만, 30대에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부족한 사람이다. (Not to be a socialist at twenty is proof of want of heart; to be one at thirty is proof of want of head)” 이 말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언급했다는 설도 있지만 실은 프랑스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했다고 한다. 또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명언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이 말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세상의 이치가 한가지 잣대로 재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도 담겨 있다.

특히 여야는 물론 세대간,계층간 이념적인 공방이 증폭되고 있는 요즘 한번 곱씹어 볼 만한 경구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사회 갈등이 사그라지기는 커녕 갈수록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식인들의 고뇌는 깊어졌고 경제정책을 놓고도 치열한 진영논리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보수층들은 60,70년대 누구나 한 번쯤은 대정부 시위에 가담해 사회개혁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론 산업화의 일원으로 국가경제에 이바지했다. 한마디로 민주화와 산업화에 모두 힘을 보탰다. 하지만 민주화의 논공행상에 드러내지 않았고 산업화의 땀방울을 벼슬로 생각하지 않았다.

박세일(1948~2017) 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의 드라마틱한 삶 속에도 그런 치열한 여정이 녹아있다.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그는 김영삼,노무현, 박근혜 등 3명의 대통령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어찌보면 좌와 우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괴물처럼 버티고 서있는 좌우의 경계를 부수고 조국을 업그레이드 하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온통 ‘조국의 선진화와 통일’에 촛점이 맞춰졌다. 그러면서 ‘진보는 정책이 없고 보수는 철학이 없다’며 좌우 모두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박세일은 서울법대 재학중이던 20대에는 극렬한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했다. 사회노동운동에 심취했다. ‘동숭학회’라는 학생운동단체를 결성했다. 그의 주요관심사는 경제 개발의 그늘인 노동인권의 개선이었다. 그 때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입학한 조영래 전 인권변호사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은 박세일의 집에서 자주 어울렸다. 죽마고우인 서경석 전 경실련 의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세일의 영향으로 사회운동에 입문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산업은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돕는 아지트를 제공하고 지원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불교 신자인 그는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 재단의 후원을 받아 동경대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일본인 스승에게서 “학문을 하되, 그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유념 하면서 학문에 임하라”라는 조언을 들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박세일 전 이사장의 빈소에 남긴 어록.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박세일 전 이사장의 빈소에 남긴 어록. "고 박세일 이사장님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충격을 금하지 못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민의 통합,선진화와 21세기 한반도에서 한국이 우뚝설수 있도록 노력하신 고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한국사회의 대통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고히 영면하소서."

박세일은 일본 유학 중에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민주화 소식지의 발간에 참여했다. 이어 코넬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국가발전 전략 연구에 매달렸다. 비로소 그때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다. 생각의 추가 현실로 기울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의 후유증과 불가피성을 둘 다 이해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코넬대에서 논문(한국에서의 임금수준과 결정요인)을 쓸 무렵 비보가 전해졌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지도교수는 “당분간 한국에 들어가지 말고 사태를 지켜보자”며 세계은행(World Bank)근무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미래를 더 걱정했다. 80년 8월 귀국을 결심한다. 한국경제개발원(KDI)에 둥지를 틀었고 85년엔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로 들어갔다. 학생시위와 최루탄 가스가 범벅이 된 캠퍼스였다. 박세일은 학장보의 직책을 맡아 시위학생들을 경찰서에서 빼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나라가 민주화 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과거 적폐’에 대한 수술의 시작이었다.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단죄로 김영삼의 문민정부의 지지율은 90%을 넘겼다. 전대미문의 국민적 신뢰를 얻었다.

박세일도 YS에 호감을 가졌다. 1994년 문민정부 개혁의 밑거름을 설계하는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았다. YS는 “당장의 국정보다 미래의 조국을 설계해달라’고 말했다. 사실 박세일은 87년부터 YS의 경제교사 역할을 했다. 서울법대 후배인 박종웅(YS 공보비서관)이 다리를 놨다.

박세일은 “야당 지도자들은 국가를 이끌 리더들인데 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는 김영삼 정부의 치적을 덮어버렸다. 청와대를 나와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강의를 하던 그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삼고초려로 여의도 연구소 소장을 맡아 보수의 혁신정책을 연구했다.

그러다가 우연 하게 노무현대통령의 영입제안을 받았다. 다리는 김병준 현 자유한국당 비대위 의장이다. 하지만 박세일은 “어느 나라 진보가 나라의 역사를 공격하나”라며 노무현의 실정을 꼬집으며 뿌리쳤다.

박세일은 학자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모순덩어리가 커지는 사회를 바로 잡는데 힘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했다. 창당을 결심했다. 도박이었다. ‘국민생각’의 깃발을 들어 ‘공동체 자유주의’를 표방했다. ‘자유’가 없는 공동체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치적 심판은 싸늘했다. 현실정치의 벽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2012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효특표율이 2%에도 크게 못미쳤다. ‘국민생각’은 자연 소멸됐다. ‘우리나라에 국혼(國魂)은 있는가’라는 그의 일갈은 메아리가 없었다. 합리적 보수와 중도개혁의 이론을 펼치면서 ‘백성의 마음으로 천하를 보자’라는 포부는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부민덕국(富民德國·부유한 국민이 사는 덕 있는 나라)을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후학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영글 것이다.

박세일은 2017년 1월 뜻밖의 병마에 쓰러졌다. 지난 달 나온 그의 자서전격인 ‘경세가 위공 박세일’(최창근 저술)은 박세일의 일생을 이렇게 가름했다.

“ 박세일의 삶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었던 햇살 나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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