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6:35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0)공무원의 생활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0)공무원의 생활고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9.28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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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원의 엘리트 공무원들도 '쥐꼬리 월급'에 늘 쪼들려 … 부인들은 '봉투접기' 등 부업
보다 못한 쓰루 "원칙대로 성실히 일처리 한뒤 주는 '감사표시'는 팁으로 알고 받아쓰라"
장남 서울대 낙방하자 분위기 썰렁…재수후 합격소식에 올리는 결재마다' 베리 굿' 연발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는 가끔 사무관 이상 간부들을 구내식당에 모아놓고 훈시를 하거나 강연을 했다. 거기서 그는 기발한 이론을 펼치곤 했다.

예를 들면 "비만한 사람은 통계적으로 머리가 나쁘고, 몸이 가냘프고 여윈 사람 중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이 많다"고 했다.

왕초(장기영 전 부총리)d와 쓰루 사이에 끼어 마음고생을 겪었던 기획원 관료들은 그가 누구 얘기를 하는지 다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얘기를 하고 나서 스스로 겸연쩍은지 크게 웃었다. 어색하나마 모두들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공무원이 다 그랬듯이 기획원 관리들도 힘들게 살았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부인 김 여사처럼 헌 집을 사서 수리해 파는 '집 장사'를 하는 등 많은 기획원 관료 부인들이 부업을 해서 생계를 꾸려갔다. 어렵기는 대민 업무가 없는 기획국이 더 심했다.

직원들이 원고를 쓰고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고, 부인들이 집에서 봉투 접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는 공무원 봉급이 매우 낮아 인사 정도의 사례를 받는 것은 모른 체할 때였다.

한번은 최우석 당시 기획원 출입기자가 쓰루에게 "공무원 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사고가 안 났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아무리 조심해도 한번 역풍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건 운수소관으로 돌려야지. 공무원은 된다 안 된다를 분명히 해야 해. 돈을 챙기려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아야 해. 특히 돈을 거절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절대 원망을 사서는 안 돼"라고 답했다.

구내식당 간부 교육에서 쓰루가 한 훈시 중에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 것이 '뇌물 강의'였다. 뇌물을 받아도 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공무원이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은 철칙이다. 특히 조합이나 협회의 뇌물은 독약이니까 절대로 먹지 마라. 그런 돈 받으면 한 번에 간다."), 뇌물을 받을 때의 원칙과 행동 수칙("부득이 뇌물을 안 먹고는 못 견딜 사람이라면 일은 원칙대로 성실히 하고, 일이 끝난 후에 감사 표시로 주는 뇌물은 팁과 같이 받아라.

쓰루의 부인(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은 양지회 등 활동을 통해 친분을 갖게 된 박 통의 부인 육영수 여사(멘 오른쪽)dh의 자녀교육 등 사적 애로 해소에 역할을 함으로써 그녀와의 친분을 두터이하고 지냈다.
쓰루의 부인(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은 양지회 등 활동을 통해 친분을 갖게 된 박 통의 부인 육영수 여사(멘 오른쪽)의 자녀교육 등 사적 애로 해소에 역할을 함으로써 그녀와의 친분을 두터이하고 지냈다.

뒤에 걸리더라도 정상 참작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원래 될 일을 상대를 괴롭혀서 더 많은 뇌물을 받아내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돈을 얼마를 받느냐를 두고 사전에 줄다리기를 하지 마라. 공무원은 국민에게 서비스하는 직업이니까 최대한 서비스해줘라. 사전에 받으면 많이 받을 걸 나중에 받으면 줄어들 것이다. 그걸 팁으로 생각하고 받아라.") 등 뇌물 수수의 단계별로 구체적인 팁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번은 월요일 간부회의 때 "어제 골프장에 갔더니 과장 몇 놈이 보이더군. 모두 다 이마빡에 도적 도(盜) 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어. 과장 놈들이 일요일에 골프장에 오는 것은 도적질했다고 광고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하고 일침을 놓았다.

부총리 비서들이 남에게 손 벌리는 것도 철저히 막았다. 총무부에서 나오는 공식 판공비조차 못 쓰게 했다. "정치적으로 나를 때려잡으려면 나를 잡는 게 아니라 너희들을 잡는다. 그러니 절대 돈 먹지 마라. 대신 우리 마누라가 돈이 많으니까 그 돈을 갖다 써라" 했다.

한번은 조선호텔에서 비서들끼리 술을 마셨다. 그 정보가 그에게 들어갔다. 그날 단체 기합을 줬는데, "옆에 끼고 있던 여자가 누구냐",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비서 새끼들이 호텔에나 다니고 말이지" 등등 분을 참지 못해 퍼부었다.

쓰루는 공(公)과 사(私)가 구별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개인사도 관료생활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1년 365일을 공인으로 살았던 그였지만 사적 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늘 공인으로 지내는 사람치고는 자주 휩싸이는 사적 감정을 느낌 그대로 밖으로 드러냈다. 좋게 표현하면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지만, 그에게 당한 사람에게는 공적 리더로서 갖춰야 할 사적 감정 표현의 절제 능력이 부족한 관료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개인사로 생긴 기분이 사무실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 에피소드 하나.

1969년 1월 말, 그의 장남(필자)이 서울대 법과대학 입시에 낙방을 했다. '머리 좋은' 그의 집안에 (필자 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는 그가 부총리가 되기 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와신상담하고 있을 때였다.

낙방 소식을 들은 날, 그는 거나하게 술을 걸치고 밤늦게 귀가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집안은 쥐 죽은 듯했다. 바로 장남이 안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잔뜩 움츠러든 장남에게 그는 "낙담할 것 없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내년에 서울대에 붙으면 된다"고 뜻밖에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장남을 위로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부드러운 아버지'에 장남은 의아했다. 그는 몇십년 전 자신이 겪은 대학 낙방 얘기를 해주었다. "원래 도쿄제국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거기에 원서를 내기 전에 거쳐 가야 한다는 예비학교에 원서를 냈으나 떨어졌고, 그래서 주오대(中央大)에 갈 수밖에 없었다" 등 장남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를 담담히 전해주었다. 얘기가 끝나는가 싶은 순간부터 그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굵어지던 눈물은 어느새 울음이 되었다. 서로 얼싸안은 부자는 한참 동안 통곡을 쏟아냈다.

그해 연말이었다. 기획원 장관실의 박명석 비서관이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분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부터 쓰루와 같이 근무해온 터였다. 그 통화 내용.

(쓰루 장남) "아, 아저씨! 어쩐 일입니꺼?"

(박 비서관) "별일은 없다. 그런데 정수 니, 공부 잘하고 있제?!"

(장남) "예~?!"

(박 비서관) "단디 해서 내년에는 꼭 붙어야 한데이~! 니가 우리를 안 죽일라 카몬 우야든지 붙어야 한데이~!"

(장남) "지가 대학에 떨어져서 아저씨들이 고생 많이 했지예?! 미안합니더. 이번에는 꼭 붙을께예!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장남이 대학 입시에 낙방을 한 후 사무실 분위기가 안 좋았으리라 다들 짐작은 했다. 그러나 입시 결과 발표 후 몇 주 동안 경제수석실이 그토록 힘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올리는 결재마다 퇴짜를 맞았고, 업무 보고하러 들어간 사람마다 '깨져서' 나왔단다.

박 비서관 등 주변의 은근한 '압력'과 격려 덕분인지, 필자는 1970년 초에 지망한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과에 '편하게' 입학할 수 있었다. 합격 발표 후 몇 주 동안, 경제기획원 부총리실은 천당 같았단다. 결재를 받기 위해 장관 비서실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앞서 결재받은 사람이 집무실에서 나올 때의 표정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올리는 결재마다 프리패스였고, 보고 내용을 들을 때마다 쓰루가 "베리 굿, 베리 굿!"을 연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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