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사재 출연할 정도로 '독립 경제연구소'에 강한 애착심
부원장 내정 김만제에 朴대통령 "신문에 글 잘썼대"라며 초대원장 발탁
두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짜면서 쓰루나 기획원 관료들이 절감한 것은 제대로 된 경제개발계획을 세울 우리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경제 분석과 전망을 하려 해도 해외의 전문가를 초빙해야 했고, 계획 수립을 하려 해도 국제금융기구 등에 용역을 줘야 했다.
자연스레 정부 안에서 '나라경제는 커지고 복잡해지는데, 언제까지 외국 두뇌에 우리 경제의 장래를 맡길 것인가. 외국에 있는 우리 두뇌를 데려다 정책 수립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우리 두뇌'에 대한 아쉬움은 특히 박통이 강했다. 2차 계획의 '아버지' 쓰루 기획원 차관 역시 인재 양성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2차 계획에 경제연구소 설립을 계획사업의 하나로 포함할 수 있었다. 경제연구소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은 이희일 경제기획국장과 김만제 서강대 교수였다. 그러나 쓰루가 청와대 수석으로 물러나면서 기획원의 열의는 눈에 띄게 식어버렸다.
구체적인 진척을 보이지 않던 경제연구소 설립 작업은 1969년 쓰루가 부총리로 컴백하고 나서야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박통은 스스로 설립자가 되고 출연금을 낼 정도로 경제연구소 설립에 쓰루만큼 적극적이었다.
쓰루가 아니었다면 한국개발연구원은 KDI가 아니고 KID가 될 뻔했다. 처음 기획원 안에서 영어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Korea Institute for Development(KID)'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KIST)'의 선례도 있고, 또 '키드'라고 읽기도 쉬워서였다.
그 이름을 가지고 쓰루한테 결재를 받으러 간 담당 사무관은 "기본 영어도 모르는 무식한 놈, 돌대가리"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국가의 중요한 기관 명칭을 새끼 염소 또는 상대방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의미로 외국인들이 읽으면 어쩌려고 이런 이름을 지었냐"는 것이었다. 담당 사무관이 kid가 명사로는 '새끼 염소'이고, 동사로는 '속이다', '우롱하다'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영문 표기는 'Korea Development Institute(KDI)'로 낙착되었다.
어느 날 쓰루가 김만제 교수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기획원을 찾은 그에게 쓰루는 "사실 오늘은 KDI 인사에 관해 자문을 하고 싶어서 들어와달라고 했소. 어떤 형태로든 김 박사가 새로 발족하는 KDI에 관여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도 젊고 하니까 부원장을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의 의사를 타진했다.
김 교수는 누가 원장이 되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쓰루는 그에게 "원장감 두 사람을 추천하면 그중 한 명에게 원장을 시키겠다"면서 김 박사더러는 부원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대통령 결재는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얘기도 했다.
김 박사는 원장 후보 두 사람을 추천하고 나서, 부원장 인사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발표된 인사는 김 박사가 새 연구원의 원장이라는 것이었다. 그 뒷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가 추천한 교수들은 처음부터 쓰루나 이희일 경제기획국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하고 있는데, 박통한테서 KDI 인선이 어찌 되어가느냐고 연락이 왔다. 쓰루가 할 수 없이 "부원장은 젊고 똑똑한 사람을 구했는데, 마땅한 원장감이 없어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실토를 했다. 이에 박통이 "그 부원장감이란 게 누구입니까?" 하고 묻기에 김만제 서강대 교수라고 했다. 박통이 김 교수의 나이를 물었다. 사실대로 37세라고 하면 부원장으로는 너무 젊다고 할 것 같아서 쓰루는 "한 마흔 정도 될 겁니다"라고 약간 올려서 대답했다. 그러자 박통이 대뜸 "나이가 그만하면 적지도 않구먼……. 그 사람을 원장 시키지, 뭘 그리 고민을 합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쓰루는 인사 결재 품의서를 작성해 이 기획국장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품위서에는 김 박사가 추천한 교수 두 사람이 원장 후보로 기재되어 있고, 김 박사는 여전히 부원장 후보로 남아 있었다. 박통이 김 박사를 원장감으로 이미 결정한 상태였지만, 아랫사람으로서는 '좋은 결정은 윗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윗사람에 대한 당시의 예의요 관행이었다.
박통은 부원장 칸의 김만제 교수를 원장으로 고치고, 원장 후보 칸은 ×를 그은 뒤 서명을 하면서 "이 사람 원장 시키면 잘할 겁니다. 며칠 전에도 경제신문에 쓴 글을 읽어보니까 아주 잘됐더군" 하고 칭찬까지 했다고 한다.
다음 날 기획원에 들어온 김 교수에게 쓰루는 "나는 부원장을 시키려고 했는데 대통령이 김 박사를 직접 원장으로 발탁했으니 그 책임이 더욱 무겁게 됐어요" 하고 격려와 축하를 전했다. 좋은 인사를, (자기가 밀어서가 아니고) 윗사람이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또한 제대로 된 아랫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예의였다. 자기가 반대했던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 일이 성사가 되면, '내가 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요즈음 세태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거다.
KDI는 1971년 4월 14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둥지를 튼 곳은 KIST 등이 있는 홍릉 임업시험장 중 일부였다. 쓰루가 현장을 답사한 게 1971년 3월이니까, 한 달 만에 대통령도 참석하는 기공식을 연 셈이다. KDI 설립에 대한 그와 대통령의 열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KDI 후보지를 여럿 현장 답사한 쓰루는 풍치가 수려한 홍릉 임업시험장을 점찍어두고 있었다. 관할 부서인 산림청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시간을 끌면서 그 부지 결정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다고 지도까지 구해서 대략적인 후보지를 정한 쓰루가 마음을 바꿀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만제 원장은 장예준 기획원 차관으로부터 현장에 가서 부지를 최종 확정하자는 연락을 받고 임업시험장에 나갔다. 거기에는 산림청장도 나와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산림청장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그곳에 오기 직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그날 절차상 최종 매듭을 지을 겸, 임업시험장을 KDI 부지로 사용하게 한 것에 대해 생색도 낼 겸, 산림청장이 쓰루를 찾아갔다. 쓰루는 그의 협조에 감사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대뜸 "그만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나한테까지 왔느냐"며 불벼락을 내렸다. 그러고는 바로 장 기획원 차관을 불러 "지금 당장 KDI 원장과 함께 현장으로 가서 부지 문제를 완결해놓고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KDI에 대하여 이처럼 열성적인 김 부총리를 옆에서 지켜본 당시 경제기획원 직원들이 '저 양반이 나중에 자기가 KDI원장을 하려는 것 아니야'라고 뒷공론을 했을 정도로 그의 KDI에 대한 편애는 유별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