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6 20:05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7)경제성장과 産兒제한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7)경제성장과 産兒제한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9.07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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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매년 100만명씩 늘어나자 경제계획에 인구정책 목표치 설정
콘돔무료배포ㆍ 정관수술 보상금 지급 등 ' 아이 덜 낳기운동 '밀어 붙여
못 태어난 아이중 '아인슈타인'있을까 걱정하며 "출생한 사람 잘 키워야"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한국전쟁 직전(1949년) 2000만 명이던 인구는 전쟁 중 잠시 증가세가 주춤하다가 휴전 후의 베이비붐으로 다시 급증세를 보였다. 1960년 경제개발 직전에 2500만 명으로 늘어나더니 1969년에는 3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매 10년마다 500만 명씩 늘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인구 감소가 나라경제를 저성장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해서 걱정들을 하지만, 당시는 일자리는 없는데 인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 빈곤 탈출과 성장의 발목을 잡아서 걱정이었다. 그래서 당시 개도국들의 경제 발전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는 얼마나 인구 증가를 억제하느냐였다. 한국의 인구정책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새마을사업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족계획(family planning) 또는 산아 제한(birth control) 정책은 다른 개도국에서 배우러 올 정도였다.

쓰루가 1969년 9월에 처음으로 3차 계획의 기본 구상을 밝힐 때, 성장률 목표치 바로 다음으로 내세운 게 인구증가율 목표치였다. 당시 2.2%인 인구증가율을 계획 기간 중 매년 0.1%씩 낮추어 1976년에 1.5%까지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목표에는 실무자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었다.
쓰루가 1969년 9월에 처음으로 3차 계획의 기본 구상을 밝힐 때, 성장률 목표치 바로 다음으로 내세운 게 인구증가율 목표치였다. 당시 2.2%인 인구증가율을 계획 기간 중 매년 0.1%씩 낮추어 1976년에 1.5%까지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목표에는 실무자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었다.

쓰루가 1969년 9월에 처음으로 3차 계획의 기본 구상을 밝힐 때, 성장률 목표치 바로 다음으로 내세운 게 인구증가율 목표치였다. 당시 2.2%인 인구증가율을 계획 기간 중 매년 0.1%씩 낮추어 1976년에 1.5%까지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목표에는 실무자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었다. 3차 계획을 짤 때 실무자가 경제성장률을 높게 잡았다가 그에게 낭패를 당했는데, 인구증가율에 관해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2%가 넘는 당시의 인구증가율을 감안해 실무자는 제 딴에는 추진 가능성을 감안한다며 3차 계획이 끝나는 1976년의 목표 인구증가율을 1.8%로 잡았다. 그걸 쓰루에게 보고하자 바로 "1.3%로 낮춰라!"는 호통이 돌아왔다. 3차 계획의 실무 책임자인 이희일 경제기획국장까지 나서서 "인구증가율을 그렇게 낮추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고, 연구 용역을 맡은 서울대 측도 "1.5%도 힘들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 목표 달성을 향해 쓰루 스타일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정관 수술을 하면 보상금을 지급하고, 콘돔을 무료 배포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구 억제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는 나라 살림 전체로는 긴축의 고삐를 놓지 않았지만, 보건사회부에서 가족계획 예산을 요청하면 "이 사람들아, 국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을 그렇게 소홀히 해서 되겠어?" 하면서 요청액의 몇 배로 예산을 늘려주곤 했다. 덕분에 2%가 넘던 인구증가율은 1974년에 1.73%로 떨어졌고, 1976년에는 1.61%로 목표치에 근접했다. 일단 목표를 세우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달성하고 마는 군사정권 때의 정책 추진의 단면을 보여준다.

1970년 2월 25일 부산 극동호텔에서 '인구계획과 경제개발'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미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등지의 전문가와 정책 수립자 약 50명이 참석했다.

기조연설에서 쓰루는 각종 인구 통계조사가 '교육 수준이 낮은 여자일수록, 가계가 가난할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하며,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유리한 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국 가족계획 사업에 대한 자랑을 잊지 않았다. 그 국제회의의 최대 관심거리는 한국의 가족계획 성공 사례였다.

해외 특히 개도국으로부터 온 청중을 의식해서였는지, '엄중하게' 연설을 풀어가던 그는 어느 대목서부터 유머 감각에 연설을 맡기고 만다. "내가 가족계획을 추진하면서 혹시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지는 않나 걱정을 하는 순간이 있다. 아이를 넷 낳을 가능성이 있는 여자가 정부의 가족계획사업에 협력하느라 아이를 셋만 낳았다고 하자. 그럴 때에 낳지 않은 한 아이가 인류 문화 복지 향상에 크게 공헌할 '아인슈타인'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었을는지도 모르는데 그 좋은 기회를 상실하지 않았느냐 하는 걱정이다. 이 태어날 수 있었던 위대한 인물인 '아인슈타인'의 상실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이미 출생한 사람을 교육하고 단련해 '아인슈타인' 정도는 안 되더라도 그에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언론이 주목한 것은 유머가 아니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여자와 빈곤층이 애를 많이 낳는다'는 지적이었다. 아무리 그것이 조사 결과이고 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언급이 품고 있는 여자와 빈곤층에 대한 비하는 지나칠 수 없었다. 다출산에 대한 비하는, 그것이 비하라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시 만연해 있었다. 오죽하면 1960년대의 가족계획 캠페인 표어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겠는가.

세계은행은 가족계획 성공사례인 한국에 기꺼이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당시 세계은행은 많은 개도국을 지원했는데, 한국 등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공 례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었다. 특히 인도 등 대형 개도국의 인구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였기에 세계은행으로서는 한국이야말로 여타 개도국에 '우리가 권하는 대로 한 한국을 봐라. 그들을 따르라'고 권장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1970년 5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가 방한을 했는데, 미리 배포한 도착 성명은 '가족계획사업의 세계적 성공 사례인 한국에 왔으니, 인구 증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노력에 관심을 갖겠다'는 것이었다.

맥나마라가 공항 귀빈실에 마중 나간 쓰루를 보자마자 건넨 첫인사 겸 질문은 "당신네 아이는 몇이냐?"였다. 쓰루가 "3남 1녀다. 그런데 우리 애들이 태어날 당시에는 가족계획이란 게 없었다"고 옹색하게 대답했으나 그가 당황했던 건 분명하다. 그의 궁색한 변명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1950년생 장남부터 시작해 1958년생 막내까지 네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때는 분명히 가족계획 같은 게 없었다. 자식이 넷씩이나 되는 것은 가족계획을 밀어붙이는 그의 입장에서는 남 앞에 체면이 서지 않는 꺼림칙한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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