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만한 軍의류 수출 물량 따내 지금도 '섬유 수출의 전설'기억
우리나라는 지난해 6000억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이 만큼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 중국, 독일,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 6개국 정도다. 건국 70년 만의 개가다.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고 그날을 기려 수출의 날을 제정 한지 54년만에 수출액을 6000배로 키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를 세운 국가 중 이런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처럼 수출을 많이 하다 보니 수출이 쉬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했다.
1960,70년대에는 자원은 물론 기술이 없었다. 내세울 변변한 제품이 없던 시절에는 은행 잎을 모아서 수출했고 지렁이도 내다 팔았다. 그때는 가발과 의류 수출은 ‘고급 제품’축에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에 국가 경제의 운명을 걸었다. 달러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구조를 바꾸기가 어렵다고 믿었다. 달러가 있어야 필요한 원자재와 설비를 들여와 생산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달러관리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있었다. 기업들은 달러를 ‘배급’받았다.
1970년대 들어 제대로 된 수출을 한번 해 보자며 정부가 육성에 나선 게 종합무역상사였다. 일본의 총합상사(總合商社)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중 소제조업체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자금력과 해외네트워크를 갖춘 대형 무역업체를 내세워 해외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포석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1인당 소득 1천달러, 수출 100억달러'의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에 총력을 기울일 때였다. 하지만 74년과 75년에 연거푸 2년 연속 수출목표에 미달했다. 게다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 국가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자칫하면 국가 부도사태를 맞을 위기였다.
사실 삼성은 정부보다 한발 앞서 종합무역상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71년 정부에 건의서를 냈다. ’종합상사 육성에 관한 삼성의 대정부 건의서‘는 바로 종합상사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삼성은 이를 위해 수출전선의 전열을 정비했다. 75년 1월 그룹의 수출창구를 일원화했고 해외 지점망도 확충했다.
누가 먼저 종합상사 1호 기업이 되느냐를 놓고 삼성,대우, 현대가 물밑경쟁을 벌였고 삼성물산이 가장 먼저 서류를 갖춰 상공부에 접수 시켰다. 드디어 ‘1호 종합무역상사’가 탄생했다. 75년 5월19일이다. 삼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가 된 그 해에 굵직한 수주를 해 무역업계를 놀라게 했다.
사우디 정부와 1억 달러 상당의 군복을 납품하는 계약을 맺었다. 중동에 가장 먼저 진출했던 삼성물산은 베이루트 지점을 통해 사우디 정부의 발주정보를 분석하고 대책을 먼저 세울 수 있었다.
지금이야 1억달러라고 하면 대수롭지 않은 금액이나 당시 신문과 방송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할 정도로 빅 뉴스였다. 1억달러 어치의 군복에는 양말,내의 등을 합쳐 가지 수만 300여 종이 넘었다. 이 옷들을 쌓으면 서울 남산 크기의 산이 될 물량이었다. 서울은 물론 수도권 일대의 봉제공장은 난데없는 일감이 들어오자 이를 소화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지금도 이 군복 수출은 한국 섬유 수출역사의 전설로 남아있다.수출에 정부가 다걸기를 하면서 종합무역상사는 구직자들이 가장 가고 싶은 회사가 됐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 나라 밖으로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고 수출 역군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삼성물산은 1975년~ 1977년 수출총액 기준으로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1호 종합무역상사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90년대 들어 삼성전자 등 삼성의 계열사들이 독자적인 해외 수출망을 갖추자 삼성물산의 무역패턴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지금은 3국간 거래와 해외 자원개발, 전기설비 등 에너지 인프라 구축 등으로 해외비즈니스 사업구조를 고도화하면서 ‘종합무역상사’의 뼈대를 유지하고 있다. 수출보국의 전초기지였던 종합무역상사는 곧 우리나라 경제의 역동성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경제가 가라앉은 요즘 그 때의 도전과 ‘하면 된다’는 굳은 의지를 무장했던 ‘상사맨’DNA가 재발현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