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부처 상공부 따돌리고 기획원 주도로 ' 4인 위원회 '만들고 함구령 내려
일본차관 겨냥해 한일각료회담 열었으나 일본 '잠재적 경쟁자' 의식해 주저
1970년 7월 초 박통은 청와대로 쓰루를 불러 4대 핵공장 건설을 서두를 것을 주문했다. 안보 상황이 긴박해지고 있어서 자주국방력 강화를 서둘러야 했다.
베트남전쟁 패전으로 미국은 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새로 들어선 닉슨 미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이라는 불개입 외교 노선을 선언했다. 발등의 불은 미국이 닉슨 독트린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던 주한미군 철수였다. 박통의 지시를 기다렸다는 듯이 쓰루는 즉석에서 "4대 핵심 공장이면 무기 생산이 가능하다. 건설에 필요한 외자는 일본의 차관으로 충당하겠다"고 답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4대 핵공장 중심으로 무기를 생산하고, 일본 차관으로 그 공장을 건설한다'는 안이 이미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회동을 계기로 4대 핵공장의 성격은 민수(民需)에서 군수(軍需)로 그 중심적 성격이 공식적으로 전환되었다. 쓰루는 발 빠르게 새 사업 추진 체계를 갖추어갔다. 그날로 관련 부처 차관보급으로 군수 공장 건설을 위한 '4인 위원회'부터 만들었다.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 상공부 차관보, 국방부 군수차관보, KIST 부소장 등 4명이 그들이다. 대외적으로는 이 위원회를 '중공업추진단'으로 불렀다.
첫 회의에 나타난 쓰루는 "오늘 회의는 절대 비밀이다. 앞으로 5개의 공장 건설 사업계획서를 작성한다. 주물선 공장, 특수강 공장, 중기계 종합 공장, 조선소, 신동 공장 등 5개 공장이다. 신동 공장의 사업계획서는 상공부, 나머지는 KIST에서 작성해라. 기간은 1주일이다.
기한을 엄수해라. 기한을 넘길 수 없다. 모두 밤샘 각오를 해라. KIST에서 합숙해라. 이상 끝!" 하고는 나가버렸다. (훗날 70년대 후반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를 주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상공부 오원철 차관보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회의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계획서 작성에 단 1주일만 준 것은 2주 뒤 서울에서 예정된 한일정기각료회담에 4대 핵공장을 핵심 안건으로 올릴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포철에 이어 대통령이 특별히 관심을 두는 4대 핵공장과 신동 공장까지 쓰루가 기획원 조직을 통해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형태가 되었다. 원래 주무 부처여야 할 상공부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와 개인적으로 막역한 이낙선 상공장관조차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쓰루의 복심인 엄 비서실장의 진사로, 어느 부처가 4대 핵공장을 관할해야 하느냐의 이슈는 일단 물밑으로 가라앉혀놓았다.
4대 핵공장에 대한 협력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제4차 한일정기각료회담의 모든 협의와 의전은 일본 측의 입맛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사용하는 언어부터 그랬다. 쓰루의 개회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토의가 일본어로 진행됐다. 심지어 실무진까지 회의장은 물론 로비에서도 일본어를 쓰도록 했다. 이런 '환대'를 두고 신문은 '용어로만 보면 마치 일본 국내 회의 같은 인상'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한일각료회담에서 4대 핵공장 건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쓰루가 "중공업 차관을 비롯한 주요 의제가 이미 비공식 모임에서 타진되어 양해되었다"고 큰소리쳤지만, 4대 핵공장이 의제의 하나로 채택된 것, 그리고 향후에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합의가 고작이었다.
석 달 후 10월에 일본 조사단이 방한했다. 단장은 아카사와 중공업국장이었다. 쓰루가 친한(親韓) 인사라고 생각해 직접 단장으로 지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카사와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관료였다. 1주일 조사를 하고 일본 정부에 제출한 그의 보고서는 쓰루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었다. '첫째, 조선과 기계는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 난점이 많다. 둘째, 특수강과 주물선은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는 특히 조선사업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아무 실적이 없는 한국이 처음부터 대형 선박을 건조한다는 계획은 무모하다'는 얘기였다.
일본은 그 전해(1969년)까지의 일본, 즉 한국에 대한 투자와 상업차관 제공에 열을 올리던 그 일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한국을 잠재적 경쟁자 또는 자기네의 텃밭인 세계시장을 교란하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의 중공업화에 심기가 불편한 통산성의 입장이, 한일경협에 긍정적인 외무성 입장을 압도한 것이다.
포철에 이은 또 하나의 쓰루 신화는 출발선에 서보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론의 인식은 여전히 '4대 핵공장이 향후 한국의 중화학화를 이끌 것'이라는 거였다.
"새해(1971년)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끝내고 새로 제3차 계획으로 이행하는 중흥의 환절기다. 마침 정부는 푸짐한 설계를 펼쳐 들고 있다. 첫 컷은 4대 핵공장. 이미 건설을 서둘고 있는 석유화학 콤비나트와 함께 우리나라 산업 구조를 고도화할 주역이다. 포항종합제철도 공연하고 있다. 둘째 컷. 수많은 기계공업들은 그 단역들이다. 머지않아 핵공장들은 방위산업으로도 구실을 할 것이고 기계공업들은 다가올 10년의 공업 입국에 총아가 될 성싶다……."(매일경제 1971년 1월1일자)
포항제철 건설 때와 같은 일본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신호가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쓰루는 여전히 4대 핵공장이 주도하는 중공업 육성에 대해 일본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접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71년 3월까지도 "4대 핵심 공장을 금년부터 1972년 초까지 착공하여 1973년부터는 한국도 중화학공업 단계로 들어갈 것"이라며 일본의 협력을 전제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71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5차 한일각료회담에서도 쓰루의 혼신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일본은 4대 핵공장 건설 협력에 관해 지난해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입장을 보였다. 4 핵공장(약8000만 달러)과 조선소, 그리고 지하철 건설사업 등에 해외경제협력기금 등 약 2억 달러의 차관을 한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물론 8000만 달러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쓰루는 그 합의로 '4대 핵공장이 일본이 발을 뺄 수 없는 양국 간 경제 협력사업으로 등극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가 4대 핵공장을 통한 한국의 중공업 입국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레이스의 바통은 청와대에 넘겨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