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9:3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3) "경부고속도 만든 정주영 맞소?"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3) "경부고속도 만든 정주영 맞소?"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8.10 0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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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으로 가는 '중공업 육성의 기치' 내걸어 '특수강ㆍ 주물ㆍ 조선ㆍ 기계' 4대 핵심공장 추진
포철 제궤도에 오르자 자신감 얻은 김학렬 부총리, 집서 관련 전문 서적 탐독 ' 정책 밑그림 ' 그려
재정 어려워 민간주도 방식 채택… 조선 기술제휴와 차관도입차 해외갔던 정주영회장 빈손귀국
鄭회장, 포기하려하자 朴대통령 "현대가 조선안하면 앞으로 일절 도움을 주지 않겠소"최후통첩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북한의 비핵화가 글로벌 토픽이 되는 요즈음 들어도 깜짝 놀랄 일이지만, 박 정권이 한때 추진하던 사업 중에 '4대 핵공장' 건설사업이란 게 있었다. 핵폭탄이 아닌 중화학 핵공장 얘기는 아래와 같다.

1969년 10월 즈음에 이르러서는 포철 건설이 제 궤도에 진입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성공적 출범은 안 그래도 '어려운 일은 내가 푼다', '박통이 나는 믿는다'는 자신감에 찬 쓰루를 더욱 고무했다.

이때부터 그의 관심은 제철이라는 단일 산업에서 중공업 전반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포철은 됐다. 이젠 중공업이다'라며 포철의 '성공 패턴'을 중공업 입국사업으로 확대 적용하려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업이 박통의 지시가 아니라 쓰루의 자발적인, 선견지명의 발상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쓰루와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은 1969년 11월 향후 한국의 중공업 입국을 이끌 핵심적 공장 건설에 관한 공동 연구를 미국 배텔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와 국내 KIST에 발주했다. 최 소장은 KIST의 초대 소장이자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1971년 3월 23일 쓰루는 이낙선 상공장관과 함께, 4대 중공업 핵심공장 등을 1973년까지 건설하여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완전히 구축하겠다’고 장담했다.
1971년 3월 23일 쓰루는 이낙선 상공장관과 함께, 4대 중공업 핵심공장 등을 1973년까지 건설하여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완전히 구축하겠다'고 장담했다.

쓰루는 전문가들에게 연구 검토를 맡겼다고 손 놓고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철강 전문가에 버금가는 지식을 쌓아가며 포철의 출범을 독려하던 그 아닌가.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퇴근 후 집에서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중화학공업 입국을 위한 고민과 구상으로 밤잠을 설쳤다.

부인이 깰까 봐 라이트가 달린 펜을 구해 끊임없이 독서와 메모를 했다. 그 메모는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KIST 등 전문가들을 집무실로 불러 벽에 한가득 펼쳐진 중화학공업의 상류산업(up-stream·해당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료 및 소재 산업), 하류산업(downstream ·해당 제품을 사용하는 산업) 연관흐름도(flowchart) 아래서 중화학 입국에 관한 그들의 의견과 구상을 듣곤 했다.

공동 연구 결과인 '한국 기계공업 육성 방안'은 1970년 6월 초에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된 후, '중공업개발 종합 시책'으로 공표되었다. 그 자리에서 쓰루는 "중화학공업화는 저개발국이 선진 공업화의 꿈을 실현하는 데에 꼭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면서 "4대 핵공장 건설을 주축으로 체계화 및 계열화된 중공업 육성 방안을 마련하여 강력히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원래 공동 연구가 선정한 핵심 사업은 제철, 특수강, 주물, 신동(伸銅), 조선, 기계 등 6개 분야였다. 그런데 제철은 포항제철로 이미 건설이 시작되었고, 신동 공장은 군수업종이라 발표에서 제외하다 보니 '4대 핵공장'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쓰루의 생각으로는, 4대 핵공장은 어디까지나 민수(民需)산업이었다. 그 투자나 건설을 민간이 맡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사업성이나 자금 동원 부담 때문에 희망하는 업자가 없을 때는 정부가 출범을 주도한다는 생각이었다. 정부의 재정 압박도 민간 참여를 절실하게 했다. 당시는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 대형 국책 사업으로 예산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민간 사업자 중에 가장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은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이었다. 4대 핵공장의 하나로 조선소가 선정되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정 회장이었다. 조선의 경우, 현대건설을 사업자로 선정하고 난 다음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정 회장이 기술 제휴와 차관 도입을 위해 접촉한 선진국들은 하나같이 '개도국 한국에 조선업은 무리다'라는 의견이었다. 그는 조선사업을 포기할 생각으로 귀국했다. 정 회장의 마음을 다시 돌리는 데 실패한 쓰루는 그를 박통과 만나도록 주선했다.

조선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정 회장에게 박통은 "국가가 절실히 원하고 대통령이 염원하는 사업인데, 이렇게 쉽게 못 한다는 소리가 나오시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고속도로를 건설한 정주영 회장이 맞소?"라며 질타를 퍼부었다. 그러고는 "현대가 조선사업을 포기하면 앞으로 어떤 사업에도 정부가 일절 도움을 주지 않겠소"라는 통첩으로 분노를 마감했다. 정 회장은 다시 조선소 사업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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