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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2) 고달팠던 '식량 자급자족'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2) 고달팠던 '식량 자급자족'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8.03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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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공업화로 농지 줄고 매년 풍수해로 쌀 생산량은 오히려 감소해 비상
필리핀서 한국토양에 맞는'기적의 볍씨' 개발… 전국보급에 예산 우선 배정
북한 주민을 포함해 한국민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의미를 담아 '통일벼'명명
1970년 첫 수확후 각료들과 시식한 朴대통령 "밥 맛 없다고 한 사람 누구냐"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식량의 자급자족은 신생 독립 극빈 개도국 대한민국의 최우선 국가과제였다. (당시는 지방 건설사업의 근로 대가로 임금 대신 무상원조로 받은 밀가루를 나눠주곤 할 때였다.)

박 정권도 집권 초기부터 식량 증산정책을 추진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공약 중 하나도 식량 자급자족이었다.

그런 박 정권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양곡 생산은 오히려 (3.5%) 줄어들고 있었다. 가뭄이나 홍수가 여전한 데다가 공업화, 도시화로 쌀을 경작하는 논이 계속 줄어들어서였다. 그처럼 생산은 줄어만 가는데, 소비는 급속히 늘어만 갔다.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급격히 늘고 인구도 늘어서다. 쌀을 수입하는 데에 한 해 수출액의 10%에 이르는 외자를 써야 했다.

갈수록 자급자족의 날은 더 멀어지는 듯했다. 자급자족 공약을 내놓은 67년에 88%이던 자급률은 68년에 79.8%, 69년에 77.7%로 두 해 연속 내려가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볍씨는 필리핀의 국제쌀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가 개발한 '기적의 볍씨' IR8이었다. 종래의 볍씨보다 배의 수확량을 보이고 있었다. 1967년에 희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6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드디어 IR8을 한국 토양에 맞게 개량한 '한국형 기적의 볍씨' IR667이 개발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하천은 번갈아 밀어닥치는 홍수와 가뭄의 피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는 1968년 7월 홍수로 주택들이 물에 잠긴 영산강가이다.
당시 우리의 하천은 번갈아 밀어닥치는 홍수와 가뭄의 피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는 1968년 7월 홍수로 주택들이 물에 잠긴 영산강가이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식량 증산정책을 추진했고 1967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공약 중 하나도 식량 자급자족이었지만 쌀 생산량은 홍수 등으로 오히려 줄어 박통과 쓰루의 애간장을 태웠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IR667의 개발과 보급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그것을 제대로 경작하려면 논을 종래보다 깊이 일궈야 하고 상당한 관개시설이 필요하며 비료 소요도 엄청났다. 그 재원 확보에 총대를 멘 사람이 바로 쓰루였다. 예산 배정에 상당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부총리 자리에 오른 후의 쓰루는 마치 IR667이 자기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예산 배정에 심한 '편애'를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쓰루와 IR667 사이의 긴 인연도 그 편애의 한 원인이었다.

그는 IR667로 쌀의 자급자족과 나아가 녹색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농정 발표의 자리이든, 인터뷰이든, 대담이든, 국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듯 'IR667을 통한 녹색혁명'을 되풀이해 설파했다. 그의 녹색혁명 사랑은 심지어 외국 언론의 인터뷰에까지 등장했다.

1970년 권농일(勸農日·6월 10일)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주요 인사들이 시범 모내기에 참여했다. 박통을 비롯한 삼부 요인에 농민 대표와 주한 외교사절까지 1200여 명이 심은 것은 단순한 벼가 아니었다. 그들은 '녹색혁명'의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쓰루도 당연히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그 볍씨는 '내 새끼'나 다름없었다. 그해 10월 IR667을 처음 수확하면서 쓰루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도 녹색혁명의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감개무량해했다.

그달 월간경제 동향 회의 후 대통령과 각료들이 그 쌀로 지은 밥을 시식했다. 그리고 밥맛이 어떤지 무기명 투표를 했다. 밥맛이 괜찮다는 의견이 15표로 압도적이었으나 맛이 없다는 의견도 3표 나왔다. 그 3표에 속이 상한 박통이 "이거 누가 쓴 거야?" 하고 불만을 표시했다. 쓰루가 바로 "아직까지 배가 부른 사람이 있어서 맛을 따지는 모양입니다"라고 받았다. 누구인지 모르나 문제의 3표를 던진 인사들은 진땀깨나 흘렸을 거다.

IR667의 작명도 그 시식회에서 이뤄졌다. 시식을 하면서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IR667이라고 하면 농민들이 알 수가 없지 않느냐, 우리말로 좋은 이름 없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여러 가지 이름이 거론되다가 북한 주민을 포함한 한국민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의미를 담아 결국 '통일벼'라는 이름으로 낙착되었다.

1976년은 한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이룩한 해였다. 통일벼 덕분이었다. 그 벼가 전체 재배 면적의 44%로 확대 보급되어 평년보다 21.8% 늘어난 521.5만 톤의 쌀(80㎏짜리 65만 2000가마니)을 생산해낸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쌀의 자급자족을 이루겠다는 쓰루의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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