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3 05:35 (목)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1) '4대강개발' 원조朴대통령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21) '4대강개발' 원조朴대통령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7.27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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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인 공화당, 농촌에 뿌리… 집권 세력 대부분이 지방 출신
박대통령 ' 農工 균형발전 ' 강조…홍수방지 항구적 대책주문
광주서 영산강 개발계획 발표하자 전남商議회장 ' 감사 ' 연발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는 농민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으로도, 언행으로도, 농촌 출신 촌놈임을 숨길 수 없었다.

당시는 촌놈 세상이었다. 쓰루뿐 아니라 대통령부터 시작해 당시 집권 세력 가운데 지방 출신을 빼고 나면 몇 사람 남지 않았다.

게다가 여당 공화당은 농촌을 정치적 기반으로 고 있었다. 전체 취업자 930만 명 중에 470만 명(51%)이 농어민이었다. 산업화로, 도시화로 농촌에서 많은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갔는데도 그랬다. 서울 본토박이는 숫자로나 정치·사회적으로나 소수자였다. 농업정책이 자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방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박통은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농공병진정책을 강력 추진하여 1970년대 말에는 식량의 완전 자급자족을 기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시와 공업 부문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뒤안길이 된 농촌과 농업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두 달 뒤인 3월 11일, 쓰루는 그동안 정부가 공업화에 치중하느라 얼마나 농업을 도외시했는지 자성하는 것으로 농업과 농촌 개발정책에 공식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1969년까지 도입한 외자 총 24억 3400만 달러 중 농업에 들인 돈은 4800만 달러(1.95%)에 불과했다. 그는 "(향후) 세계은행과 USAID 등에서 들여오는 장기 재정차관을 농업 부문에 중점적으로 투자, 획기적인 농업 발전을 이룩하여 녹색혁명을 달성하겠다"는 말로 농공병진정책이 나아갈 바를 밝혔다.

3차5개년 계획 등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국내홍보에 쓰루는 세계은행 등 해외경제전문가들을 즐겨 동원하였다. 사진에서 1970년 5월 방한한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오른쪽)가 쓰루(가운데)의 유머에 파안대소하며  5천만달러 규모의 철도차관에 서명하고 있다.
3차5개년 계획 등 한국경제발전에 대한 국내홍보에 쓰루는 세계은행 등 해외경제전문가들을 즐겨 동원하였다. 사진에서 1970년 5월 방한한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오른쪽)가 쓰루(가운데)의 유머에 파안대소하며 5천만달러 규모의 철도차관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는 거의 매년 홍수나 가뭄을 겪었다. 그 피해가 막심했다. 한 해 평균 홍수는 60여억 원, 가뭄은 40여억 원의 피해를 남겼다. 인명 피해를 빼고도 그런 계산이 나왔다. 홍수나 가뭄 4년으로 경부고속도로(418㎞)를 하나씩 날려버리고 있었다.

1970년에도 어김없이 홍수가 닥쳤다. 수해 현장을 둘러보던 박통은 "상습적인 가뭄과 수해를 그때그때의 임시 대책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다"며 "한강, 금강 외에 낙동강, 영산강 등에 종합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항구적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의 한·수해 대책은 사후약방문 내지는 임시변통 땜질이었다. 홍수로 둑이 무너지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둑을 다시 쌓고, 가뭄이 오래가면 기우제를 지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박통의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4대강 종합개발' 주문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획기적이었다.

차원을 달리하지만 4대강을 통으로 개발하겠다는 아이디어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나오기 50년 전에 이미 국가과제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얘기다. 4대강 유역엔 농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말이 4대강이지 면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삶의 범위로 대한민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64%에 총인구의 62%가 살면서 GNP의 67%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산악 지역을 빼고 나면 거의 전 국토, 전 국민의 삶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은 단순한 하천 정비사업이 아니었다. 가뭄이나 장마를 겁내지 않는, 3500만 민족을 위한 낙토(樂土)를 이루려는 민족의 숙원사업이었던 것이다.

대선이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1971년 2월 24일, 광주에 있는 전남도청에서 도청 건물이 세워진 후 최대 행사가 열렸다. 4대강 유역 종합 개발계획을 확정하고 발표하는 자리였다. 대회의실에는 쓰루를 비롯하여 내무, 농림, 건설부 장관과 관계 기관 대표 및 영산강 유역 11개 군 2개 시의 군수 및 시장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회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그 웃지 못할 사연은 이렇다.

마침 세계은행이 한국에 주요 항만 개발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도 있고, 선거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쓰루는 부산에서 항만 관계 장관회의를 열기로 했다. 2월 14일 한껏 참석 범위를 늘려 잡은 그 회의에는 인천, 군산, 목포, 여수, 속초 등 10여 개 지역 항만 관계자들이 다 모였고, 행정관료 중에서는 쓰루 외에 국방, 상공, 교통부 장관과 건설부 차관, 관세청장, 수산청장, 부산시장 등이 참석하고 있었다.

회의 결과, 외자 1675만 달러, 내자 69억 원 등 총 515억 원의 재정 투자(당시 정부 예산의 6분의 1에 해당)로 부산항을 비롯한 12개 전국 주요 항만을 중점 개발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기본 계획과 재원 조달 방안까지 마련된 후 개최된 항만 개발 장관회의는 쓰루의 효율적인 사회 진행도 한몫을 해 1시간을 넘기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신문에 관련 내용이 크게 보도된 데서 터졌다. 신문 1면을 장식한 그날 기사를 본 호남 쪽에서 '우리는 푸대접하는 것이냐'는 불만이 일어난 것이다. 대책을 고민하던 부총리 비서실장 머리에 2월 24일로 예정된 영산강 개발사업 착공식이 떠올랐다.

쓰루는 "이왕 영산강 착공식을 하게 된 마당에 광주에 가서 장관회의를 한번 크게 합시다"라는 비서실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부산의 항만 개발 장관회의 후 불과 열흘 뒤에 광주에서 영산강댐 사업 착공식과 더불어 4대강 유역 종합 개발을 위한 관계 장관회의가 거창하게 치러지게 된 배경이다.

그 회의에서 쓰루가 전남의 숙원사업인 영산강 유역 개발계획을 설명하고 나자, 바로 뒤이어 전남상공회의소 회장이 "존경하는 부총리 각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부총리도 각하라고 부를 만큼 권위가 있었다!) 영산강 개발이 끝나면 우리 전남도 여느 지방 못지않게 경제개발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도민의 한 사람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라며 감사를 연발했다. 신문들은 '선거전 광주에서 시작되다'라는 제목하에 유진산 씨(야당 총재)와 쓰루의 사진을 1면에 톱으로 배치했다.

축제 분위기는 그날 저녁 광주 호텔에서 열린 영산강 착공 기념 리셉션으로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쓰루는 "전남의 생명줄인 영산강 개발사업을 진짜로 착수합니다. 이 김학렬, 거짓말 못 합니다. 기대하시고 협조해주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다.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이 바로 이어서 "제가 알기로는 김 부총리는 거짓말을 못 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회의장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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