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3:05 (토)
◇김수종의 취재여록⑦흑인 청년의 '富農 꿈'
◇김수종의 취재여록⑦흑인 청년의 '富農 꿈'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06.01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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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생계비 1달러…한국NGO그룹 찾아와 "농업기술 선진국 한국서 배우고 싶다"
현지 교포 사업가 집에서 '흑인 하녀' 보며 만델라 이후의 '흑백 차별주의' 도 실감
자원 많고 일부 첨단 기술 갖춘 남아공 잠재력 컸지만 20년 지난 지금도 개선 요원

요하네스 정상회의 기간 중 내가 본 2명의 남아공 사람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정상회의에 앞서 각국 시민단체(NGO)들이 요하네스버그의 우분트빌리지에서 각종 행사를 벌였다. 민속공연도 하고 포럼도 개최하고 쉬기도 했다. 넓은 잔디 공터에는 일종의 NGO 캠프촌이 형성되었다. 개별 NGO팀이 터를 잡아 준비한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쉬었다. 외교부의 수고 덕분인지 한국에서 간 NGO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다. 그 때 든 생각은 한국의 오일장 같다는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이 왔나요?”라고 얘기하자 누군가 “외교부 직원이 400명은 왔다고 얘기합디다.”고 말했다. 그게 정확한 숫자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NGO 사람들이 많았다.

절기상 8월말은 남아공에선 늦겨울이었지만 초여름처럼 더웠다. 각국 NGO들의 행동을 보며 앉아 있는데 젊은 흑인 청년이 한국NGO팀들 사이를 헤매며 뭔가 묻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이 앉아 있는 곳으로 접근하기에 손짓해서 내 옆에 앉혔다. “왜 한국 NGO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너무 신기했다. “한국은 농업기술이 발달한 나라이다. 나는 농부인데 한국의 농업기술을 얘기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흑인 청년은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29세 총각 농부였다. 농사로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이 300랜드(미화30달러)라고 했다. 유엔의 기준으로 보면 세 식구가 하루 1달러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자였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농사로 살수 없어 친구들은 마을에서 떠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농사짓는 법을 개량해서 수확을 올리고 싶고, 지속가능정상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한국이 농업혁명에 성공한 나라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나는 한국 NGO사람들 여럿에게 “혹시 농업관련분야 NGO에서 참석한 분이 있느냐.”고 말하며 이 흑인 청년의 사정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 청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청년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댕큐, 굿바이”라고 인사하며 내 곁을 떠났다.

그 때 나는 크게 깨달았다. 400명이 모인 한국NGO사람들은 농촌과는 거리가 먼 도시형 환경운동가들이었다. “저 불쌍한 아프리카 청년을 도와줄 한국인은 없구나. 한국이 농업 국가를 이미 졸업해버린 것을 몰랐다가 여기서 알게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의 60%이상인 농업국가 한국의 농촌에서 자랐고, 대학과 초임 신문기자 시절에 초여름이면 하곡(보리) 수매가 결정이, 초가을이면 추곡(쌀)수매가 결정이 뜨거운 뉴스가 되었던 시절을 살았던 나는 선진 제조업국가에 살면서 아직도 농업국가DNA를 머릿속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대표들이 회의를 하는 컨벤션센터가 위치한 인구 20여만 명의 샌턴시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 부유층이 몰려 사는 곳이다. 흑백분리(Apartheit)정부 아래서 부유한 백인들만이 철통같은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거주하던 곳이었다.

컨벤션 센터에서 교포 기업인을 만나 컨벤션센터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찍이 대기업 사원으로 나왔다가 현지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근처에 있는 자기네 집에 가서 차나 한잔 하자고 제안해서 따라 나섰다. 그의 주택은 성벽처럼 토담이 둘러싸여 있고 마당 안에는 야자수가 가득한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넓은 거실 소파에 둘이 나란히 앉았고,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출입문이 열리더니 30세는 더 되어 보이는 흑인 여성이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들어와 멀찌감치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녀 같았다. 그의 지시를 받은 하녀는 뒷걸음으로 물러났다가 잠시 후 차반을 들고 들어와 우리 앞에 공손히 꿇어앉아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 맛이 확 달아날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역사드라마에서 보는 궁궐 나인이 임금에게 대하는 태도 같았다.

만델라 대통령 정부 때 이미 흑백차별이 철폐되었지만 아직도 사회생활에서는 흑백차별이 버젓이 살아있는 광경이었다. 나중에 듣고 알았지만 이런 부자동네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흑인 여성들은 일자리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남아공 사람은 내가 리우+10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하자 “흑백분리정책이 철폐되기 전까지 흑인이 그 지역에 들어가려면 여권(Passport)이 필요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일행이 케이프타운을 방문했다. 케이프타운의 뒷면을 병풍처럼 에워싼 산이 그 유명한 테이블마운틴이다. 그 아래 위치한 시그널힐에 올라가자 안내인이 대서양위에 떠 있는 납작한 섬을 가리키며 만델라가 17년간 갇혀있던 ‘로벤섬’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일행이 케이프타운을 방문했다. 케이프타운의 뒷면을 병풍처럼 에워싼 산이 그 유명한 테이블마운틴이다. 그 아래 위치한 시그널힐에 올라가자 안내인이 대서양위에 떠 있는 납작한 섬을 가리키며 만델라가 17년간 갇혀있던 ‘로벤섬’이라고 알려주었다. 왼쪽은 당시 동행했던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사진=이코노텔링.

내가 본 가정부와 흑인 청년은 남아공 흑인들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차별과 가난이었다. 남아공에서 200년간 이어진 인종격리정책(Apartheid)의 뿌리 깊은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아공을 여행했을 때는 새 헌법에 의해 이곳 흑인을 영원한 하인으로 복속시켰던 인종격리정책은 철폐된 지 10년이 되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1999년 퇴임한 지 3년 후였지만 법과 현실의 괴리가 깊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케이프타운을 방문했다. 케이프타운의 뒷면을 병풍처럼 에워싼 산이 그 유명한 테이블마운틴이다. 그 아래 위치한 시그널힐에 올라가자 안내인이 대서양위에 떠 있는 납작한 섬을 가리키며 만델라가 17년간 갇혀있던 ‘로벤섬’이라고 알려주었다.

화란과 영국의 식민주의 통치부터 독립 후에는 백인정권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400년간 정치범 등 사회적 문제아를 격리했던 유형의 섬이다. 드넓은 남대서양에 떠 있는 여의도 두 배의 이 섬은 남아공 해안에서 불과 11㎞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헤엄치고 건널 수 있을 듯 가까웠다. 그러나 대서양의 차가운 한류와 상어 떼 때문에 역사상 단 한 사람만 탈옥에 성공했을 정도로 비정한 유형지다. 국립박물관으로 변신한 이 섬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일정상 불가능해서 아쉬웠다.

인구 350만 명의 케이프타운은 남아공의 빈부격차가 확연하게 대비되는 곳이었다. 온화한 기후, 아름다운 산과 해변, 미국 캘리포니아의 말리브 해안을 방불케하는 고급 주택가, 교외로 쭉쭉 뻗은 잘 정돈된 도로, 시내의 문화시설과 쇼핑몰이 미국이나 서유럽의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교외의 경관은 더욱 풍요로웠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겹겹이 포개진 구릉은 밀밭이 아니면 포도원이다. 간간이 노란 유채 밭이 섞여서 마치 거대한 수채화를 보는 것 같았다.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 속의 유럽이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 풍경은 바로 유럽 식민주의자 후손들의 것이었다.

당시 남아공의 1인당 국민소득(GDP)는 3000달러였다. 화려한 케이프타운의 쇼핑몰과 풍요로운 밀밭을 보면서 왜 국민소득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엔 전혀 다른 얼굴이 있었다.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거대한 빈민촌을 보았다. 양철 판 하나로 지붕을 덮고 쓰레기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포장마차 크기의 집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수처리를 비롯한 위생시설이 없는 동네 개천은 뿌옇게 오염되어 있었다. 번화가에는 거지 떼가 수십 명씩 몰려다니다 행인을 보면 동전 한 닢 달라며 달려들었다. 케이프타운 인구 350만 명 중 100만 명이 생계수단이 없는 빈민이었다. 거리에서 잠자는 노숙자가 5만 명이라는 현지 뉴스방송을 들었다. 인구 600만 명의 요하네스버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실업률이 30%였다.

나중에 현지인의 설명을 듣고 그럴 수밖에 없는 남아공의 문제를 알게 됐다. 만델라 흑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농촌인구가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또 인접국에서 인구가 유입됐다. 인근 국가 사람들이 보기에 기후가 좋고 번듯한 대도시가 많은 남아공은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흑인 운동가들이 투쟁할 때 인접국은 그들을 음양으로 지원했던 은인들이어서 흑인정권은 이들 나라에서 유입되는 이민물결을 매정하게 규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는 흑인정권 수립 후 남아공에는 유럽계 자본이 빠져나가고 투자가 감소하면서 기업 활동이 저조해졌다. 실업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아공이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여 아프리카 제일의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아프리카문화의 힘은 아니었다. 유럽의 선진 제도와 500만 명의 백인들이 그들만의 사회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단순 노동력을 제외하고 흑인을 참여시키지 않았던 인종분리정책의 유산이 남아공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의 12배가 넘는 122만㎢의 광대한 국토와 대서양과 인도양에 걸친 넓은 영해를 가진 남아공은 여행자의 눈에도 경제 강국의 잠재력이 넘쳤다. 석유를 뺀 모든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의료 원자력 석탄화학기술은 세계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기존의 백인 두뇌와 새로 교육받은 흑인의 두뇌가 조화로운 흑백화합을 실현할 수 있다면 4,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남아공이 아프리카의 선도국가로서뿐 아니라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2002년부터 18년이 흐른 지금 남아공의 인구는 5900만 명, GDP는 3,71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6,300달러다. 인구도 많이 늘고 경제도 커졌지만 아직 잠재력에 크게 못 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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