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는 격조 있는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다. 맨해튼 한복판 곳곳에서 무료 예술공연이 자주 펼쳐진다. 전세계 예술인들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 홀(미드타운 57번가)은 수준높은 퍼포먼스를 공개한다. 이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1835~1919) 덕분이다. 미국에서 자선사업하면 그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카네기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직조공 아들로 태어났다. 1850년대 직조기술의 기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자 그의 아버지는 이민 보따리를 싼다. 신천지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카네기는 어린 시절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일터로 나가 잡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어렵싸리 돈을 모아 미국 철강업계를 평정한 그는 천문학적인 재력을 쌓았지만 이의 90%를 사회에 내놓았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다"라며 그는 60대중반에 미국 4분의 1이나 점유하고 있던 철강 회사를 J.P.모건에 팔아 미련없이 사업에서 손을 뗀다. 이후 축적된 부를 사회 골고루 나눠줬다. 그런 점에선 록펠러와 흡사했다.
카네기는 도서관 기부에 역점을 뒀다. 전세계 3천개의 도서관을 지어줬고 거금의 지원금도 흔쾌히 내놨다. 대부분의 미국 도서관 로비에는 어김없이 그를 기리는 '감사패'가 걸려있다. 뉴욕의 공공도서관은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100년전 당시에도 노른자위의 땅에 궁궐같이 대리석으로 도서관이 지어졌다. 왜 그랬을까. 카네기는 어릴 적 배우지 못한 한을 도서관에서 조금이나마 풀었다고 한다. 배우고 싶지만, 일터로 나가야했던 그는 틈틈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인생의 내공을 쌓았다. 곧 책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뜬 것이다. 카네기멜론 대학, 교육진흥재단과 각종 평화재단을 설립했고 그 운영에 많은 돈을 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네기 홀도 그가 없었으면 탄생할수 있었을까. 카네기의 인생모토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비난을 두려워하라.” 한자말로 표현하면 지기추상(待己秋霜·스스로를 추상같이 대한다)쯤 될 것 같다. 그는 자신을 통제해야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누구보다도 한 눈팔지 않고 일을 한 배경이다. 그의 묘비명엔 이렇게 적혀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 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워있다.”<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겸 미국 뉴욕주 공인중개사 / henryk@nestseeker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