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2:30 (목)
뉴욕을 만든 사람들㊳(끝)'뉴욕설계의 아버지'모지스
뉴욕을 만든 사람들㊳(끝)'뉴욕설계의 아버지'모지스
  • 이코노텔링 곽용석 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20.05.11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0년대 '마이카시대'열리자 뉴욕 도시인프라 개조작업 절실
공무원 신분아닌 임시직 인 '프로젝트 플래너'로 도심개발 주도
연방 정부와 뉴욕시의 경제적 지원없이 개발펀딩으로 자금모아
욕을 많이 먹었지만 순환도로 달리다 보면 그의 추진력 떠 올라

어느 한 대도시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반 시설의 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울의 경우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20여년간 이뤄졌으며, 뉴욕에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본격적으로 완비된다. 서울시의 남산 1,2,3호 터널, 한강대교, 올림픽강변 도로, 도심 네거리의 고가도로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뉴욕시의 경우 이와 같은 모든 기반시설들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믿을 수 있을까.

In 1956, Robert Moses, then the New York City parks commissioner, stands at Pierrepont Plaza Park in Brooklyn, just above the new Brooklyn-Queens Expressway.AP
모지스가 1956년 브루클린에 있는 피에르폰트프라자 공원에 서 있는 모습. 이 공원은 퀸스고속도로 바로위에 있다.

'로버트 모지스' 뉴욕 도시개발의 마스터플래너. 오늘날 뉴욕 도시 기반시설을 완공한 종합 개발기획자다. 현재 뉴욕의 도시 기반 중추시설을 총체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불도저 같은 성격인 그는 동네마다 전통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밀어부쳤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독재자와 독불장군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온갖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은 사람이다.

뉴욕의 도시정비는 이미 19세기에 모든 정비가 끝났지만, 1940년대부터 마이카 시대를 맞이하여 중산층 생활 향상과 거기에 맞는 도로 및 단지 정비 시설이 필요했다.

특히 자동차 도로의 신규 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도시 과밀화는 결국 외곽으로의 탈출이라는 대대적인 프로젝트로 인해 도심주변에 수많은 단독주택단지들이 들어선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에서는 각종 도로 정비망이 필요했다. 고속도로, 고가도로, 순환도로 및 다리와 터널이 필요했다. 또한 주변 시설의 재정비와 주택단지내 공원시설와 놀이터 및 각종 공공시설이 필요했다.

그 정점에 바로 그가 있었다. 그의 강력한 행정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뉴욕, 맨해튼은 상상하기 어려운 복잡함과 불편함으로 뒤엉킨 도심으로 남았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그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선출직 공공부분의 정식 직원이 아니었다. 뉴욕시 행정국장이라는 타이틀은 있었으나 신분상 공무원이 아닌 임시직 형태의 프로젝트성 타이틀인 것이다. 그는 그러하기 때문에 오히려 뉴욕시나 주정부 및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프랭클린 루즈벹트 대통령도 함부로 그의 정책과 추진력에 가타부타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교묘한 신분상태의 환경이 그로 하여금 무소불위 같은 파워를 통해 거대한 대도시의 기반시설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행정당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적인 혜택이 없이 제3자의 입장에서 정부사업을 추진했던 점은 공공적 프로젝트 추진방식의 또 다른 모델을 보여준 셈이다.

나아가 그의 프로젝트들은 연방정부나 시당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도 거의 없었다. 프로젝트 개발 펀딩이라는 형태로 돈을 모았다. 벤처기업이나 관련 기업들로부터 개발 투자자금을 끌어들였다. 개발 채권형태로 자금을 끌어 모은 후 기반시설이 완공된후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이용료 징수 방식으로 수익을 거둬 채권자들에게 투자자금을 배분하는 형태로 했다. 자본주의와 개발 논리의 교묘한 조화다.

물론 그의 개발방식이 결국 수익자 중심으로 흘러가는 단점은 있을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철저한 이익과 배분이라는 숨은 논리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발과 기존 도시의 보존주의자들의 원성이 그래서 만만치 않았다.

지금에서의 평가는 갈린다. 반대편에 섰던 제인 제이콥스 같은 도시 보존주의자인 경우 도심의 재개발이 가져오는 삭막함과 시멘트 덩어리 속에 결국 하층민들의 퇴거와 썰렁한 건물 집단 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주장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뉴욕 인프라의 큰 그림은 로버트 모저스가 다 기획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뉴욕의 행정국장으로 공공개발 밑그림을 그릴 당사의 모저스가 개발모형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사진=
뉴욕 인프라의 큰 그림은 로버트 모저스가 다 기획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뉴욕의 행정국장으로 공공개발 밑그림을 그릴 당사의 모저스가 개발모형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그러나 모든 면은 양면이 존재한다. 효율성과 편리성에서 볼 때 그리고 나아가 경제적인 면에서 봤을 때 모지스가 추진한 프로젝트는 분명 한 단계 올라선 도심 개발이고 완성이다.

일부 보존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도시 개발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는 도시의 발전과 편리성과는 별도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낡은 도심 개발이 모든 사회적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판도라 같은 해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1888년 뉴욕주 윗 쪽인 코네티켓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사 온다.

중상층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란 똑똑한 청년은 예일대를 졸업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는다. 평소 뉴욕시의 행정적, 정치적 도시 재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지인이 주정부 책임자로 지명되면서 그도 함께 뉴욕시 공공기반 개발사업에 참여케 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탁월하고도 추진력 있는 결과로 다각적인 기반 사업들이 하나 둘 씩 그에게 맡겨진다. 1930년대초 대불황의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뉴딜과 같은 개념의 뉴욕시 재건사업으로 정부에 부담을 지우지 않는 펀딩방식 투자자금 확보로 일약 이 분야에 독보적인 존재로 부각된다.

그의 행보에 뉴욕시 전체 개발 방향이 좌지우지 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간다. UN 국제연합 건물과 맨해튼 강변 고속 순환도로, 문화 복합센터인 링컨센터 등 굵직한 맨해튼 기반시설 등도 그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완성되어간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그도 1960년대를 기점으로 그의 영향력에 많은 반발과 반대파들의 맹렬적인 비난으로 힘을 조금씩 잃게 된다. 결국 그는 1970년대 무대 뒷면으로 사라지면서 이후 조용한 삶을 보낸다.

이후 맨해튼 동북쪽 어퍼이스트 조용한 동네 요크빌이란 곳에서 마지막을 살았다. 1981년 92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가 살았던 코업아파트가 얼마전 시장에 매도 희망가격 20억원으로 리스트로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뉴욕사람 중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욕을 얻어 먹은 사나이. 한편으론 가장 무섭게 몰아부치며 뉴욕시 근대 도시 개발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사나이는 그렇게 살다 갔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당시 시점으로 환원해서 해야 만 한다. 후손들의 평가에 항상 큰 단점이 있는 것은 바로 현재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점이다. 거의 100여 년이 되어 가는 과거 모습을 지금 손자 세대인 후손들이 평가하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다.

“로버트 모지스, 그는 과연 뉴욕을 살렸는가 아니면 망쳤는가?”

아직도 이곳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옴짝달싹 못하는 과밀화된 뉴욕에서 더 이상 대대적인 개발은 커녕, 몇 미터 도로 신규 개통이나 고가도로 등 신규 개설은 이제 불가능하다. 지금의 맨해튼 순환 강변 고속도로의 편리성은 아는 사람만이 안다. 그가 없었다면 뉴저지나 롱아일랜드에서 차를 가지고 맨해튼으로 들어오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오늘의 편리함은 당연한 것이고 불편한 것은 항상 과거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폐습은 이제 버려야 한다.

◆알림◆ 이코노텔링이 창간기획의 하나로 2018년 10월부터 시작했던 '뉴욕을 만든 사람들' 시리즈가 이번에 게재된 38회를 끝으로 1년6개월간의 연재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어떤 인물들이 '세계의 경제수도'인 뉴욕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뉴욕시민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한 사람이 도시를 얼마든지 바꿀수 있다는 반면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독자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코노텔링 편집자 올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