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견인 사슬이 묶어진 '기족주의' 등에 업고 집단의 이기주의로 빚어진 부패에 눈감아
검찰의 '깨끗한 손' 소탕작전불구 마피아의 테리로 저항고 정친은 법을 바꿔 법망 피해
G7국가의 만성 침체… 경제난 돌파위해 중국에 밀착… 중국인 많아져 '코로나 산사태'

마오쩌둥 시절에는 아이를 삶아서 비료로 썼다, 무솔리니는 단지 유태인들에게 휴가를 줬을 뿐이다, 서양 문명이 이슬람 문명보다 고급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선탠까지 제대로 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도 선탠했더라, (월가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부탁하며) 우리 이탈리아에는 예쁘고 늘씬한 여비서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탈리아에는 미인들이 너무 많아 성폭행을 막을 수 없다, 나하고 섹스하고 싶으냐고 여성들에게 물으면 30%는 '그렇다'고 하고 70%는 '뭐? 또 하자고?' 이렇게 말한다, 선거기간 중에는 섹스를 끊겠다.....
공식 석상에서 이런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우리나라라면 '영구적인 사회격리'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여성단체는 물론, 여성운동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정치인이라면 어떨까. 그는 물론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줄 게 뻔하다. 사과해도 소용없다. 막말도 한 두 번이지 이처럼 계속된다면 아예 정계를 떠날 생각까지 해야 할 것이다. 그와 가까운 사이라면 그와 '정치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살길이다.

하지만 이런 막말을 하고도 멀쩡하게 정치를, 그것도 여러 차례 최고 권력자로 권좌를 차지하게 해 준 나라가 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어느 후진국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G7 국가 중 하나로, 선진국 중 선진국으로 꼽을 만 한 나라, 이탈리아다. 이 '선진국' 이탈리아에서 무려 세 차례나 총리를 지낸 인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가 이 '막말'의 주인공이다. 사실 그는 말만 막 했던 게 아니다. 그의 '기행'은 '막말' 이상이다. 탈세에 뇌물에 불법도청.... 여기까지는 그나마 봐줄만 하다. 그러나 그는 더 멀리 간다. 미성년 모델과 함께 마약ㆍ섹스파티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총리 재임 기간 중에. 이 정도면 언행(言行) 모두에서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이 정치를 제대로 할 리 없다. 그래서 영국의 세계적인 경제잡지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2011년 6월 11일자 커버스토리에서 그에게 '한 나라를 송두리째 말아먹은 사나이(The man who screwed an entire country)'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한 마디로 그 때문에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그의 장기 집권은 이탈리아를 급성질환(acute disease)이 아닌 만성질환(chronic disease)으로 이끌었다고 비난한다. 그가 만들어낸 '이탈리아병'은 그만큼 치유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기사는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었는지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지금 다시 봐도 정확한 분석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명예와 관련된 것이다. 한 나라의 총리가 어떻게 일명 '붕가붕가파티'로 불리는 마약ㆍ섹스파티를 즐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미성년자와.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추문으로 현직 총리가 법정에 서는 것은 총리 개인은 물론 나라의 이름을 더럽힌 꼴이 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나라의 수장(首將)이 나라의 명예를 말아먹은 꼴이다.
둘째는 사업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사업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그 나라 최대 사업가라면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기 쉽다. 그는 총리 재직 전부터 총리를 그만 둔 뒤까지 사업과 관련해 다수의 불법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야 했다.
그는 탈세에, 사기에, 분식회계에, 뇌물 등 웬만한 죄목에 다 걸려 있다. 그의 죄질이 특히 무거운 이유는 자신의 죄를 유야무야 넘어가기 위해 나라 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고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여러 차례 실형을 모면할 수 있었다.

셋째, 기사가 그에 대해 가장 부정적으로 보는 것인데, 바로 나라 경제 전체를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기사는 그의 집권기 동안 이탈리아의 GDP 성장률은 세계 최 하위권이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그의 집권 말기인 2010년 전후해 이탈리아의 공공부채는 GDP 대비 120%로 세계 3위 수준이며 2000년부터 10년 동안 이탈리아의 생산성은 5%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25%에 이르는 청년실업률은 유럽 최하위권이며 이로 인해 이탈리아 청년들이 나라를 떠나는 비극을 만들었다고도 말한다.
이처럼 기사는 베를루스코니의 악행과 실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글 마지막은 "이탈리아는 유로존 내 꼴찌그룹에 속하게 될 것"이라며 "그 범인은 단연 베를루스코니"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기사를 본 독자라면 그가 진짜 나라를 말아먹은 인물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할 게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오직 한 사람 때문에 한 나라의 경제가 망가지고 나라가 위기를 맞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사건의 책임을 사람 한 명 또는 사건 하나에 떠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이보다 명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계나 언론이 선호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논리다. 자칫 진정한 위기의 원인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금의 시기에 왜 유독 이탈리아가 위기의 원천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탈리아의 취약한 경제 구조는 확실히 베를루스코니의 총리 재임 기 개혁과 혁신이 요구됐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거꾸로 갔다. 구태(舊態)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구태를 더 강화했다. 이 점에서 확실히 베를루스코니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만일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우려대도 이탈리아의 경제위기가 세계 경제위기로 진전된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저지른 잘못의 무게는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는 비난과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이탈리아의 경제위기의 책임을 베를루스코니의 실정으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의문과 질문이 남아 있다. 온갖 엽기행각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막장 인물이 어떻게 한 나라의 최고 정치 지도가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세 차례나. 이뿐 아니다. 그의 엽기행각은 2020년 현재도 계속된다. 2020년 그는 54세 연하 새 애인을 만나기 위해 49세 연하 애인과 결별했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1월에는 '전진이탈리아(FI)' 소속으로 지방선거 주지사 후보로 출마한 한 여성의원 지원유세에서 "이 후보를 안 지 26년이 됐지만 잠자리를 가져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국민은 이 '막장 사나이'를 무솔리니 이후 최장수 총리이자 집권자로 뽑아줬다. 게다가 지금도 그의 편에 선 사람이 많다. 그는 여전히 인기 스타다. 그가 당 후보 지원유세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이를 입증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베를루스코니의 미스터리'. 필자는 이탈리아 경제위기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물론 적잖은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다. 필자는 이제 이 '미스터리'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보려 한다.
베를루스코니 개인의 역량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첫 번째 측면이다. 한 나라 국민이 아무리 똑똑하고 시민의식이 높다 해도, 그들을 통제하고 속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면, 어떤 악인이라 해도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베를루스코니는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개인 능력은 참으로 탁월하다. 이탈리아 최고 부자로 성장한 기업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은 재계뿐 아니라 정계에까지 확장된다.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첫째로 그의 사업 영역과 수완을 보자. 우선 사업영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대학졸업 후 부동산 사업을 하던 게 대박이 나 부자가 된다. 그의 능력을 보면 부동산 사업만으로도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바로 미디어 사업이었다.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방송사를 설립한데 이어 1978년에는 미디어그룹 핀인베스트(Fininvest)를 설립, 거대한 미디어왕국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전국망을 갖춘 공중파 채널 3개를 보유한 방송사에 영화 제작과 배급을 맡은 영화사, 인터넷 미디어 그룹, 이탈리아 최대 광고사와 출판사, 최대 슈퍼마켓 체인, 이탈리아 최강 프로축구단인 AC 밀란 등이 그가 보유한 기업 리스트다.
두 번째 사업수완. 이처럼 거대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그가 정치권과의 밀착이 없었을 리 없다. 그는 기업 성장 과정에서 베티노 크락시 당시 밀라노 시장과 밀착관계였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크락시 시장이 총리가 된 1983년 이후 베를루스코니는 날개를 단 듯 보였다. 1984년 민영방송 폐쇄 명령과 번복은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례다. 그해 법원은 민영방송의 폐해를 지적하며 폐쇄 명령을 내렸으나 베를루스코니가 바로 크락시 총리에게 영향력을 행사, 법원과는 반대로 민영방송을 합법화하는 긴급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두 개 법령은 향후 심각한 갈등을 보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베를루스코니가 이겼고 그에게 엄청난 부(富)와 권력을 안겨다 주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계 입문도 크락시 총리와 관계가 깊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1990년대 들어 검찰이 뿌리 깊은 부패를 척결하겠다며 일명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 작전을 펼치자 그의 후원자였던 크락시 총리 등 유력 정치인이 대거 구속되거나 정계를 떠날 입장에 처했던 것이다. 그도 위기였다. 검찰의 칼날이 언제 그의 목에 닿을지 알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결단력이 갖는 진가가 드러난다. 그는 도망가거나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돈과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도박이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좌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민은 그를 구악(舊惡) 정치인들과 연루된 기업인으로 척결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부족했다. '전진 이탈리아'라는 뜻의 '포르차 이탈리아' 당을 만든 것은 총선 4개월 전인 1993년 11월이었으며 그가 출마를 선언한 것은 고작 선거 2개월 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주 활동 무대였던 밀라노 대신 이탈리아의 정치 1번지 로마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공을 비관적으로 만든 또 하나의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우선 베를루스코니 개인적인 성공이 중요하다. 이탈리아 정치 1번지에서의 첫 도전에서 그는 무려 4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됐던 것이다. 또한 그의 주도로 만들어진 우파연합은 전체 하원의석의 60%를 차지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보유 언론사는 물론 구단 AC밀란의 말단 조직까지 활용해 불법ㆍ탈법 선거라는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의 정치적 성공에는 이후 '최초의 미디어 선거'라는 타이틀이 붙으며 중요한 연구대상으로까지 부상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성공의 배경에는 이 같은 '개인 능력'의 탁월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능력'에는 '미디어의 제왕' 다운 미디어ㆍ이미지 정치 관련 능력까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미디어 정치나 이미지 정치에는 한계가 있다. 처음에야 유권자들이 그에 대해 잘 몰라서 속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니 풀리테'를 추진하던 검찰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검찰은 그의 탈세 및 뇌물공여 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유력한 증인까지 찾아냈다. 베를루스코니는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한 채 1994년 12월 총리직을 물러나게 된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총리 생애는 8개월로 끝을 맺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생명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2001년 선거와 2005년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 총리 연한 5년을 꽉 채웠으며 2008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 모두 4차례 선거에서 승리해 3차례 총리를 지냈다. 놀라운 사실은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선거에서는 이겼다는 점이다. 2001년에는 선거 수년 전 그를 옥죄던 탈세ㆍ뇌물수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항소해 겨우 풀려난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야 했다. 2008년 선거에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막말로 선거를 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TV 프로그램에서 젊은 여성 유권자가 생활고 극복 방안을 묻자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라"고 답해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베를루스코니의 미스터리'와 만나게 된다. 그는 어떻게 온갖 막말과 비리와 실정, 그리고 범죄행위, 그것도 마약이나 미성년자 성범죄 등 파렴치한 중범죄가 드러났음에도 무려 세 차례나 이탈리아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베를루스코니는 온갖 비리와 범법행위에도 어떻게 총리가 됐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국민은 왜 온갖 비리와 범법행위가 의심되는 베를루스코니에게 표를 줬는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화와 정치, 문화와 경제의 고리를 만나게 된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성공은 이제 그가 갖는 개인적 역량보다는 그를 뽑아준 국민, 그리고 비리ㆍ범법자를 받아들이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문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베를루스코니라는 기형적 재벌과 정치 지도자의 탄생 및 성장의 토양이 될 수 있는 이탈리아 특유의 '문화'는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게 있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있다'. 바로 '가족주의'다. 이 용어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던 우리나라에도 '가족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행동규범이었다. '가족주의'란, 사전적으로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개개의 가족 구성원보다 중시하고 가족적 인간관계를 가족 이외의 사회관계에까지 확대ㆍ적용하려는 체계적 논리(사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같은 논리에는 또한 ①가부장 중심 ②남성우월주의 ③상하관계의 강조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 가족주의는 ④전체주의, 집단주의, 연고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지며, 마지막으로 ⑤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탈리아 특유의 파시즘과 가족 중심 기업, 그리고 마피아 등 범죄조직의 문화적 뿌리를, 이탈리아의 특수한 역사ㆍ문화적 환경에서 배양된 이 '이탈리아 가족주의'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가족주의에는 독특한 부분이 없지 않다. 일찌감치 이탈리아 특유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운영 장치를 마련해 뒀다는 점 또한 그렇다. 흔히 '클리엔털리즘(Clientelism)'으로 불리는 '후견주의' 또는 '후견인인제도'가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후견인제도는 신약성서에도 나와 있을 만큼 유서가 깊다. 2000년 전 로마제국 시대 후견인제도는 가난하게 말해 황제-귀족-호족 등의 서열제도 안에서 발생되는 '주고받는 관계'다. 황제는 귀족들에게 권력과 자리를 주는 대신 충성을 약속받으며 이는 귀족-호족 간에서 성립된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이 제도를 중세 장원제도의 원천이라고 보기도 한다.
가족주의와 후견인제도는 필연적으로 아는 사이에서만 뭔가 하려는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낸다. 권력자는 누군가에게 권력과 자리를 줘 후견인-1차 피후견인의 관계를 만들어 놓고, 1차 피후견인은 또 다른 사람에게는 후견인의 역할을 하며 2차 피후견인을 만들어낸다. 이 같은 방식으로 후견인제도는 순식간에 '가족'으로 불리는 하나의 '집단'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들 '가족'은 당연히 '이익'을 추구하며 이들이 얻은 이익은 '가족 구성원 간' 합리적으로 배분된다. 후견인 제도를 경제적 측면에서 '교환관계'로 이해하려는 근거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처럼 후견인 제도는 '끼리끼리 주고받은 교환관계'를 형성하고 이는 또한, 당연하게도, '부패'와 연계된다. 한 '가족'이라면 어떤 불법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한이 있어도 이익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부패는 정계, 재계는 물론 언론계와 정부, 심지어 범죄집단 마피아와도 연결돼 있다. 이탈리아 전체가 이 후견인 제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를 가리켜 '후견인-피후견인으로 촘촘하게 얽힌 그물망 사회'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진국 중 이탈리아가 세계 부패지수에서 늘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 후견인제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이탈리아의 부패 문화를 막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앞서 잠간 언급했지만, '깨끗한 손'이란 뜻의 '마니 풀리테(mani pulite)'는 이탈리아 검찰의 대대적인 부패 척결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2년 2월 이탈리아 검찰이 사회당 경리국장 치에사의 가택 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현금봉투가 이 작업의 계기가 됐는데, 당시 봉투 안에는 700만 리라(약 370만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 풀리테는 규모 면에서 압권이다. 약 2년 동안 수사받은 사람의 수가 6000명이 넘는다. 이중에는 150명가량의 국회의원과 다수의 전직 총리가 포함돼 있었다.
형식적 수사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소된 사람만 전직 총리 4명을 포함해 1400명이 넘었다. 국민의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으며 이 작업을 주도했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Antonio Di Pietro) 검사는 당시 '국민 영웅'으로까지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 작업은,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에 만연한 부패를 뿌리 뽑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명백해 보인다는 몇몇 피의자들에게 벌을 주는 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패사건에 연루됐던 정치인들은 법을 고쳐가면서까지 법망을 피했고, 마피아는 테러까지 감행하는 등 엄청난 저항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가족주의와 후견인 제도는 정치 부문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가족주의와 후견인 제도의 구성원들은 최정점에 있는 이른바 '수장(首將)'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받는다. 그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든 상관없다. 이를 거부할 때에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며 그로 인한 처벌은 감내하기 쉽지 않다. 이는 비단 베를루스코니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좌우를 떠나 이탈리아 정계 전체에 이 같은 문화가 뿌리박고 있으며 따라서 정계 전체가 비리와 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2008년 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승리했던 이유로, 좌파의 부정부패와 대안부재가 꼽히는 것도 이런 시각에서라면 이해 가능하다.

가족주의와 후견인제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부진한 경제 성적과
재정적자에도 한 몫을 차지한다. 우선 이탈리아의 산업구조에 대한 영향을 알아야 한다. 가족 중심의 경영을 벗어나지 못한 이탈리아 기업은 G7 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대기업이 없는 것이다.
둘째, 이로 인해 세계에 내놓을 만한 최첨단 기술 기업이나 제조업도 없으며, 셋째, 가족 중심으로 운영될 수 있는 명품기업이나 소규모 기업 중심의 관광산업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주의로 인한 '끼리끼리 해먹기' 풍토는 국가재정에도 악영향을 줬는데, 예를 들어, 고속도로 건설비용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5배나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는 지난 수십 년 간 정치ㆍ경제적 불안과 재정적자 등에 시달려 왔다. '유럽의 만성질환자'로 불리는 이유다. 당연히 정부도 이 같은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다양한 돌파구 마련에 애썼다. 그래서 찾아낸 새로운 파트너가 중국이었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칭을 들어가며 쓸어 모으다 시피 돈을 벌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탈리아와 얼마든 돈을 써서라도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과거의 영화(榮華)를 되찾으려는 '돈 많은 중국'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201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온 이탈리아는 2019년 3월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해온 프로젝트에 서방 선진 7개국(G7) 중 처음이자 유럽연합(EU) 창립 회원국들 가운데 최초로 참여를 결정했다. 이탈리아 내 중국인 거류자의 증가도 당연한 결과였다. 2019년 말 이탈리아에 합법적 이민으로 거주하는 중국인은 32만 명 수준으로 최근 10년 사이 25% 증가한 수치이다. 특히 세계 패션의 중심인 피렌체의 위성 도시 프라토(Prato)의 경우 인구 22만 명 가운데 20%가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가 세계 최고 수준의 코로나 바이러스 희생국이 된 배경에는 이 같은 눈물겨운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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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