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3 00:20 (월)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6) 기업의 '비명'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6) 기업의 '비명'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6.22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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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0%씩 늘던 통화량 31.6%로 줄이자 기업들은 "긴축 때문에 불경기" 볼멘소리
商議서 '생산활동 둔화'보고서 내고 공화당은 大選 등 대사 앞두고 '잿뿌린다'고 윽박
黨政회의후 金부총리는 車內 무선전화로 청와대와 조율후 바로 朴대통령만나 'SOS'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예산 긴축 때문에 행정부 안에서 나오던 아우성은 곧 민간기업 부문으로 번져갔다. 통화 긴축에 의한 경기 냉각 때문이었다.

매해 60% 이상씩 늘어나던 총통화(현금과 단기 예금)는 1970년에 들어 31.6%로 반 토막이 났다. 당시 통화정책은 한국은행이 정하는 금리가 아니라 한국은행이 찍어내는 통화량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업계는 '긴축이 심하다', '그것 때문에 불경기가 되었다', '외자 업체의 부실이 늘어나는 것도 긴축 때문'이라며 모든 어려움을 긴축 탓으로 돌렸다.

그는 그런 불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선, 긴축이라는 것부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한 해 통화량을 30~40% 늘리는데, 그게 어떻게 통화 긴축이냐?"는 것이었다. 도리어 "안정정책으로 물가가 잡히기 시작한 걸 고맙게 생각하라"며 훈계하려 들었다. 그는 당시 상황이 불경기라는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10% 넘는 성장이 어떻게 불경기냐?", "이런 경기를 두고 불경기라고 하는 것은 무식해서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한번은 대한상공회의소가 생산활동이 둔화됐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재계의 입장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아닌) 상공회의소가 대변하는 시절이라 하더라도, 꽤 '용기 있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 지적에 대해 쓰루는 "GNP가 (물가 상승을 제한 실질성장률로) 15.9%나 신장했는데 그걸 평년 수준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지구상엔 없다. 그렇게 무식한 놈이 유식한 체하는 덴 구토를 느낀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1969년 11월 3일 쓰루가 (사진 왼쪽에서부터) 이한림 건설, 남덕우 재무, 조시형 농림, 이낙선 상공부 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종합물가대책 ‘5개 당면대책과 10개 항구대책’을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69년11월3일자)
1969년 11월 3일 쓰루가 (사진 왼쪽에서부터) 이한림 건설, 남덕우 재무, 조시형 농림, 이낙선 상공부 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종합물가대책 '5개 당면대책과 10개 항구대책'을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69년11월3일자)

하지만 긴축에 짓눌려 터져나오는 비명은 윽박지른다고 억눌러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앰배서더호텔에서 당정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정부 쪽 대표는 쓰루였고,

여당 공화당 쪽 대표는 정책의장인 백남억 의원이었다. 나름대로 경제에 관해 좀 안다고 자처하는 백 의원은 회의가 시작되자 정부 긴축이 너무 심하다고 비판과 질책을 늘어놓았다.

당시는(1969년 10월에) 삼선개헌 국민투표,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와 (1971년 5월) 총선 등 여당의 명운이 걸린 정치 스케줄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당 의원들 눈에 쓰루의 긴축정책은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짓'이었다. 국회의원 재선에 목을 걸고 있는 그들의 격한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 의원이 초반 분위기를 잡자 당정회의에 참석한 장성 출신 의원 한 사람이 "지금 김 부총리가 나라 전체를 가스통에 집어넣고 있다. 업계가 질식 상태다. 당신은 지금 나치의 아이히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며 비난을 늘어놓았다.

당정회의 후 쓰루는 바로 연락을 취해 청와대로 직행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주요 부처 장관의 관용차에는 청와대, 경찰 또는 정보기관과 직접 연결이 가능한 무선전화가 설비되어 있었다. 지금의 눈에 그것보다 더 신기할 정도로 놀라운 것은, 아무리 부총리라 하더라도 전화로 당일에 대통령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상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과 주요 각료와의 긴밀한 소통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통을 대하자마자 쓰루 왈 "저 못 해 먹겠습니다."

(박통) "왜 그러느냐?"

(쓰루) "내가 오늘 아이히만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긴축한다고, 돈줄 죈다고 욕을 먹었습니다."

(박통) "그게 무슨 소리야?"

불같이 화가 치민 박통이 백 의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하는 정책인데 당에서 협조는 안 해줄망정 반대를 할 수 있는 거냐?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얘기냐?"고 퍼부었다.

그것으로 정치권(여당)의 긴축 반대가 잠재워졌다. 적어도 겉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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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와 그의 아비자인 김학력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필자인 경제학자 김정수(왼쪽)와 그의 아비자인 김학력 부총리의 일대기를 정리한 '내 이버지의 꿈'(덴스토리刊) 책 표지.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경기중,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지난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 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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